아내 구하지 못한 절망감..'삶과 죽음'을 오간 2년

2016. 4. 10.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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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세월호와 사람들
유가족이자 생존자 ㅈ씨 이야기

바로 우리 눈앞이었다. 2년 전 세월호가 가라앉던 저 모습은. 세월호 참사로 아내를 잃은 유가족이자 생존자인 ㅈ씨는 심리치료를 받으며 두 달에 걸쳐 이 그림을 그렸다. ㅈ씨 제공

기울어진 배는 침몰하는 것일까. 아니, 일어서고 싶은 것일까.

세월호에서 아내를 잃은 유가족이자 생존자인 ㅈ(52)씨는 심리치료를 받으며 그림 한 장을 그렸다. 304명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장면을 지켜보고, 배에 함께 탔던 아내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내내 시달렸던 ㅈ씨가 지난 두달간 8차례에 걸쳐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완성한 그림(8면 그림)이다. 그는 “제일 상상하기 싫은 장면이 이것인데 왠지 모르겠지만 그리게 됐다”며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맞닥뜨리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고 말했다. 오는 7월말 인양이 되면, 세월호를 다시 보러 가고 싶다고 했다. “아직 배 안에 혁규랑 혁규 아버지가 있잖아요. 그 사람들(미수습자 9명)이 없을까봐 그게 제일 두려워요.”

2년 전 4월, 세월호에 탔던 사람들이 닿아 웃음꽃을 터뜨렸을 그곳 제주도를 찾았다. 노란 유채꽃이 피기 시작한 지난달 말, 소주잔을 앞에 두고 ㅈ씨는 그날과 지난 2년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놨다.

제주 정착 1년만에 당한 사고
그날 이후 환청과 환각 시달려
“미수습자 가족들 마음 잘알아
배 인양때 9명 모두 돌아오길”

■ 그날

“여보, 이 배 잘못되면 내일 아침 언론에 대서특필될 수도 있어. 그래도 탈 거야?” “에이~ 설마. 이 큰 배가 왜 잘못돼?”

2014년 4월15일 저녁, 인천항에서 ㅈ씨는 아내에게 진짜 배를 탈 거냐고 물었다. 브라질에서 25년을 살다가 1년 전 제주에 정착해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ㅈ씨 부부는 차를 가지고 육지 여행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월호 탑승권을 끊고 차를 실어놓은 상태였다. 출항 예정시각인 오후 6시30분이 지났지만 자욱이 낀 안개 때문에 출항은 계속 미뤄졌다. 아내에게 3번을 재차 물은 끝에 ㅈ씨 부부는 배를 타지 말자고 결정했다. 선사인 청해진해운에서는 이미 실어놓은 ㅈ씨의 차는 제주항에 대놓겠다고까지 말한 상태였다.

그런데 선사에서 저녁밥을 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ㅈ씨 부부는 “이 큰 배를 언제 구경하겠냐”며 저녁이나 먹고 가자는 심정으로 배에 올랐다. 밤 9시께였을까, 수학여행을 위해 같은 배에 탑승했던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배가 출항한다는 소식이었다. 갑판으로 올라갔더니 배는 이미 항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가자.” ㅈ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떠올리기 싫은데…끔찍한데…그래도 그렸어, 여보…

ㅈ씨 부부는 권혁규(당시 6살)군 가족과 한 객실을 썼다. 혁규군의 아버지 권재근씨와 어머니 한윤지씨, 혁규군의 한살 터울 동생 권지연(당시 5살)양은 제주로 이사 가는 길이었다. “그 전날 얘기를 했어요, 마음 아픈 사연을. 따로따로 힘들게 일하다가, 제주에서 같이 살 수 있다고 하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야. 혁규는 엄마랑 아빠 사이에서 통역도 했어요. 엄청 똘똘하더라고요.” 다음날 아침, 전날 친해졌던 혁규군과 지연양이 ㅈ씨에게 장난을 쳤다. 잠이 달아난 ㅈ씨는 남매를 데리고 과자를 사주려고 객실을 빠져나왔다. 로비에 있던 아이들을 본 단원고 여학생 4명이 “아이고 귀여워~ 이리 와봐”라며 아이들을 얼렀다. ㅈ씨는 홈런볼과 밀키스, 컵라면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순간, 배가 기울었다. ‘이게 뭐지?’ ㅈ씨의 머리가 쭈뼛 섰다.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9분. ㅈ씨와 혁규군 가족에겐 이별의 순간이 됐다.

배가 급격히 기울어 ㅈ씨는 좌현 쪽으로 10여m를 굴러떨어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단원고 남학생이 물었다. ㅈ씨는 이때 갈비뼈 5개가 부러졌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 “여기 갈비뼈 부러졌대요.” 학생이 다시 다급하게 소리쳤지만, 배 안의 집기들과 사람이 모두 한쪽으로 쏠려 굴러떨어진 아수라장 속에서 다른 사람을 살필 겨를이 있는 사람은 없었다. 통증 탓에 4분 동안 꼼짝 않고 웅크리고 있었다. 몸을 추슬러 일어설 수 있을 때쯤, ㅈ씨는 “애들 어디 있어? 애들 어디 있냐고”라고 소리쳤다. 절벽처럼 기울어진 배 위쪽에서 단원고 학생들이 응답했다. “여기 있어요. 여기 잡고 있어요.”

해양경찰의 헬기 소리는 들렸지만, 배 안으로 들어오는 해경은 없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대기 방송은 계속됐다. ㅈ씨는 객실에서 자고 있던 아내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부상을 입은 탓에 기울어지고 미끄러운 바닥을 도무지 기어올라갈 수 없었다. 바닷물은 점차 배를 잡아먹을 듯 차오르고 있었다. 그는 발까지 물이 차올랐을 때 좌현 갑판 쪽 문으로 바다에 뛰어들어 구조됐다. ㅈ씨의 아내는 참사 9일 만에 주검으로 돌아왔다. 혁규군의 동생은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승객에 의해 구조됐지만, 혁규의 어머니는 주검으로 발견됐다. 혁규와 혁규의 아버지 권재근씨는 아직도 배 안에 있다. 당시 상황은 ㅈ씨의 머릿속에, 가슴속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았다. “인간이 이렇게 약하구나 생각했어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데, 아내는 구해야겠고 물은 차오르고…. 아내는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면…. 양심이라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심리치료 받으며 힘겹게 그린 그림
“맞닥뜨려야 이겨낼 것 같아…” 

세월호특별법 논의 시작되며
혈세 낭비·시체 장사라 수군수군
그때부터 유가족 협의회 나가
“사연 들으면 다 애절한데…”
차가운 시선에 두려움 느끼기까지

■ 그후

ㅈ씨는 하루아침에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이자, 생존자가 됐다. 지난 2년의 삶이 순탄했을 리가 없었다. 중상을 입었지만 아내를 찾아야 했기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팽목항을 찾았다. 아내의 주검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를 구해 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고, 환청과 환각에 시달렸다. 아내가 있던 마지막 장소였던 팽목항에 “미친 사람처럼” 다녀오기도 했다. 서울에 있다가 무작정 택시를 잡아타고 내려간 적도 있다. 주변에서 오는 연락이 싫어서 전화번호를 3번이나 바꿨다. 집에 혼자 있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눈과 귀는 세월호 관련 뉴스에 쏠렸다.

그가 집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2014년 7월이었다. 세월호 참사 관련 특별법 제정 논의가 시작되면서, 배상·보상을 둘러싸고 ‘혈세 낭비’ ‘시체 장사’ 등의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그때부터 인천에 있는 일반인 유가족 협의회에 나갔다고 한다. “방송을 보다 보니 사람들이 세월호에 탔던 사람을 욕하기 시작했어요. 사연을 들으면 어느 하나 애절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내가 왜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고요.” ㅈ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분노는 체념으로 이어진 듯했다. 그는 자신의 사연을 기사로 쓰는 것조차 꺼렸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또 욕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아직도 국민들 70%는 욕할 거예요. 그걸 일일이 가서 내 얘기 좀 들어주세요라고 할 순 없잖아요.” 깊은 탄식이 섞였다.

“우리는 살아왔지만 당신은 아내까지 잃지 않았냐”며 ㅈ씨에게 먼저 손 내밀어준 이들은 제주 지역 생존자 피해자들이었다. ㅈ씨는 이들과 함께 심리치료를 받으면서 트라우마를 이겨가고 있다. 제주 지역엔 생존 피해자가 24명이나 되지만, ㅈ씨를 비롯한 생존 피해자들이 도청과 도의원 등을 찾아가 요구하기 전까진 세월호 피해자를 위한 별도의 시설이나 프로그램은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ㅈ씨는 침몰 직전 배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탈출하라고 지시하지 않고 먼저 도망친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과 출항해서는 안 됐을 조건이지만 배를 출항시킨 정부 관계자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도, 이제 참사를 부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ㅈ씨는 “국가의 극소수 사람들이 잘못된 판단을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일벌백계해야 한다”며 “안전 불감증을 없애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외국에 오래 살다 보니 자연스레 애국자가 됐다는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했는데 이후 분열된 것이 너무 안타깝고, 서로 배려하고 화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혁규군 가족의 안타까움을 잘 알기 때문에 세월호 인양에도 관심이 많았다. 2년째 동생과 조카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팽목항에서 살고 있는 혁규군의 큰아버지 권오복씨와도 종종 연락한다는 ㅈ씨는 “이미 겪어봤기 때문에 미수습자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잘 안다”며 “세월호가 인양됐을 때 혁규군과 권재근씨가 꼭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주/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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