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탔다 입대한 청년들, 제대할 때 됐건만..

박은하 기자 2016. 4. 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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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참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존자들
세월호 인양선체를 바라보기 위해 동거차도에 세워진 움막. / 김정근 기자

지난 9일을 기준으로 725일째. 화물트럭 운전기사였던 최은수씨(43)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날이다. 눈을 감으면 꿈을 꾼다. 귀 밑에 멀미약을 붙이고 상기된 얼굴로 제주도에 가서 어묵장사를 하겠다던 아주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화물차에 그 아주머니의 이삿짐을 실었다. 함께 갑판에서 얘기하다 객실로 들어가서 잠시 쉬겠다더니 끝내 객실에서 나오지 못한 그 아주머니의 얼굴이 선명해지는 순간 꿈에서 깬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무서워서 눈을 감지 못하겠다. 2014년 4월 16일 하필이면 그 배 ‘세월호’를 탔다는 이유로 인생이 바뀌어버린 최씨는 여전히 수면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1년 전과 달라진 점은 꿈이 선명해지기 전에 나쁜 꿈일 걸 알고 번쩍번쩍 깨버린다는 점이다. 최씨는 깨고 나면 속이 망가질 걸 알면서도 술이나 약을 찾는다.

최씨의 무릎은 1년 전보다 더 나빠졌다. 참사 당일 세월호 컨테이너 박스가 풀리고 선체가 오른쪽으로 기우뚱할 때 최씨는 갑판에서 튕겨나가 수십m 아래 반대쪽 갑판으로 떨어졌다. 그때 무릎이 바닥에 부딪히면서 부상을 당했다. 헬기를 타고 온 해경에 구조된 뒤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것을 도왔다. 제주의 병원으로 옮겨져 두 달간 입원했다가 원래 자기 집인 경기 용인으로 돌아와 고대 안산병원에서 정신과 상담을 병행해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영 낫질 않는다. 뼈와 뼈가 붙지 않고 부서진 관절 사이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병원에서도 왜 낫지 않는지 정확히 진단하지 못하고 있다. 두 달에 한 번씩 약을 타 온다. 죄 지은 사람도 아닌데, 밤에도 다리를 쭉 뻗고 자지 못한다.

참사 1년 하고도 4개월이 흘렀던 지난해 8월에는 승용차를 몰고 가까운 지인의 집에 가다가 3중 추돌사고를 냈다. 8일간 입원했다.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 구부러진 무릎이 잘 듣지 않았다. 최씨는 참사 이후 트럭 운전대는 잡지 않았다. 앉으면 참사의 악몽이 떠올라 견딜 수 없었다. 소형차 운전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화물차 일을 다시 할 수 있을까요?” 1년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다시는 운전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일단 몸부터 나아야 하지만 낫고 나서 생계가 막막하다. 최씨는 대학생 딸이 있다. 딸은 참사 이후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최씨는 정부의 배상금과 위로지원금 지급 제의를 거절하고 지난해 9월 다른 세월호 생존자·유가족들과 함께 정부와 청해진해운을 상대로 별도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에 참여한 참사 피해자 가족은 131가구 425명이다. 희생자는 111가구이고 생존자는 20가구이다. 이 가운데 희생자 가족은 서울중앙지법에, 생존자 가족은 수원지법 안산지원에 각각 소장을 제출했다. 전체 희생자 가구의 32%가 소송에 참여했다. 배상금은 1인당 1억원씩이다.

민사소송을 낸 것은 재판을 통해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기 위해서다. 4·16가족협의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소송을 통해 세월호 침몰과 구조 실패 등 참사의 원인과 책임은 물론, 참사 후 피해자들에게 가해진 부당한 처사에 대해 정부와 기업의 책임을 소장에 구체적으로 명시했다”고 밝혔다. 정부 배상금을 받으면 민사재판상 화해의 효력이 생겨,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가 없다. 다만 배상 신청 후에도 배상금 결정에 동의하기 전까지는 화해 효력이 생기지 않는다. 이에 따라 몇몇 유족들은 배상 신청을 하면서 소송도 함께 제기한 것으로 전해졌다.

화물배상과 어업인 손실보상 등을 포함해 세월호 관련 접수된 전체 배·보상 접수건수는 1297건이다. 정부는 이 가운데 522건(472억원)에 대한 배·보상금 지급을 완료했다. 단원고 학생 희생자에게는 1인당 4억2000만원가량의 배상금과 5000만원의 국비 위로지원금이 지급됐다.

최씨는 정부의 배상금과 위로금 지급을 거절했기 때문에 수중에 돈이 없다. 사고 직후 월 70만원씩 지급되던 지원금은 6개월 만에 끊겼다. 동생 등 친척들이 주는 돈으로 연명한다. 지난 1월에는 보건복지부에 의사상자 신청을 냈지만 반려됐다. 여전히 낫지 않은 무릎 부상의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지난달 이의신청을 냈다. 같은 이유로 장애등급 판정도 받지 못하고 있다. 두 달에 한 번 타오는 약값만 15만원이라 부담이 만만치 않다. 투약기간이 길어지면서 몸이 점점 나빠져 가는 걸 느낀다. 지난 1월에는 안산의 416가족협의회 모임에 갔다가 갑작스러운 쇼크와 어지러움으로 119 구급차를 타고 용인 집으로 돌아왔다.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온마음센터(안산 세월호 생존자 트라우마 치료센터)에 가보면 다들 상태가 더 나빠졌어요. 멍하니 있으면서 누가 옆에서 붙잡아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있고. 화물기사 중 처음 제주행 배를 탔는데 친구는 죽고 혼자 돌아온 사람이 있거든요. 그 사람도 지금 상태가 매우 안 좋고. 특별조사위원회 조사 받고 나서 그때가 떠올라 더 괴로워하기도 하고.”

지난 1월 단원고 졸업식날 희생 학생들의 가족들이 아이들이 쓰던 빈 교실에 앉아 있다. / 강윤중 기자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 때 자해한 김동수씨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사고 직후 생활고 때문에 일을 하겠다고 일터로 돌아간 기사들도 끝내 정신건강이 더 나빠져 돌아왔다. 최씨는 그래도 언론 인터뷰라도 하며 누군가와 말을 하면 낫다고 했다. 혼자 있으면 계속 죽어가는 학생들과 아주머니가 떠올라 견디기 힘들다. 그러니 매일 밤 잠들기 전이 두렵다. 죽을 결심으로 수면제 40알, 70알씩을 들이킨 적이 있어 의사가 약을 아주 약하게 처방해준다.

생활고와 미래에 대한 불안, 정신적·신체적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최씨가 버티고 있는 것은 세월호 참사과정이 낱낱이 밝혀져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최씨는 참사 전부터 일주일에 3회는 청해진해운의 배를 탔다. 사고가 날 뻔한 순간을 숱하게 겪었고, 기어이 사고가 터지더니 304명이 희생된 참사로 번졌다. “육지에서 사고가 나면 금방 올 수 있는데, 선박이라는 게 바다 위에서 고장이 나면 대처가 빨리 되기 어렵죠. 파도도 계속 쳐서 위험하기도 하구요. 사고가 나면 남에게 미루지 말고 제깍제깍 와서 구조를 해야 하는데. 선장이랑 몇몇만 조사 받는 게 아니라 다 조사 받게 해서 앞으로는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최씨는 특조위의 활동기간이 너무 짧아서 아쉽다고 전했다. 최소한 배를 인양하고 선체 조사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해경과 선사가) 구조 책임을 서로 미루다 사고가 난 것”이라는 사실이 지난 2년간 밝혀진 것을 성과로 꼽는다. 지금 한국에서 다시 선박사고가 난다면 역시 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애들 하고 아주머니 하고 많이 저기(죽게) 돼서. 구조를 많이 하지 못해 가지고. 그게 좀 원통하죠. 저희가 힘이 없었어. 최대한 한다고는 했는데.”

참사 직후에도, 1년 후에도, 2년이 다 돼도 최씨는 같은 말을 했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시간이 멈춘 이상 1년이 지나든 2년이 지나든 시간의 변화가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경제적 고통은 진상규명 작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유민아빠로 알려진 김영오씨(46)는 지난달 2일 누적된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잠정 활동 중단을 선언하기도 했다. 김씨는 지난달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잠정 중단하게 되었다”면서 “대출은 더 이상 할 곳이 없고 당장 생활비와 월세 낼 돈이 없어 직장을 알아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투쟁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며 “싸우고 싶어도 돈이 없어 싸울 수 없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는 심경을 전했다.

김씨는 새 일자리를 찾았다. 지난달 18일부터 tbs교통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가슴에 담아온 작은 목소리’(95.1㎒)의 진행자 겸 현장 리포터로 사고를 당하고 방치된 이웃이나 도시재개발 주민 등을 찾아다닌다. 김씨는 “생명 존중을 절대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여력이 되면 다시 (진상규명 작업에) 앞장서겠다”고 전했다.

최씨가 불면증과 통증으로 보낸 고통스러운 2년을 군에서 보낸 젊은이들도 있다. 세월호에는 방현수씨(당시 20살) 등 군 입대를 앞둔 20대 청년 4명이 배식 및 행사지원 아르바이트차 배를 탔다. 이 가운데 2명만 살아 돌아와 한 달 만에 입대했다. 두 청년은 곧 제대를 앞두고 있다. 어떻게 군생활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둘은 군 입대 전 매일 울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수씨의 아버지 방기삼씨(51)는 “(아들의 친구들이) 입대 전 찾아오고 휴가 때 찾는다고 했는데, 입대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4월 16일 온다고 한다”고 전했다. “세월호 2년이오? 잘 먹고 지냅니다. 산 사람은 그렇게 되더군요. 자식 잃은 부모에게 1년이 지나든, 2년이 지나든 의미가 있습니까. 다 똑같고 의미 없는 게지요.” 반어와 자조로도 슬픔은 가려지지 않았다.

세월호에 탔던 단원고 학생들은 지난 1월 졸업식을 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생존학생과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학생 등 모두 86명의 재학생들은 2월 10일 비공개 졸업식을 열었고, 돌아오지 못한 250명에게도 명예졸업장이 수여됐다. 세월호 참사 당시 생존학생은 75명이었으나 이 가운데 1명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남은 이들은 여전히 세상. 특히 언론과 마주하기가 두렵다. 상처를 가슴에 조심조심 담고 살아가는 가족들은 때때로 가슴을 휘저어놓는 사건과 마주친다. 이달 초 김동혁군(당시 단원고 2학년 4반) 앞으로 병무청으로부터 신체검사 안내문이 날아왔다. 가족들은 안내문을 받아들고 밤새 울었다고 전해졌다. 가족이 진상규명 작업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어, 이런 안내문이 발송됐다.

박진 416연대 운영위원은 “참사 2년째의 상황이 더 나쁘다. 첫해에는 특별법이 제정되면 특조위가 출범하고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기대했던 특조위가 끊임없이 방해를 받으며 계속 난파선인 데다, 정부·여당은 조사 청문회를 두 차례를 했는데 법에 약속된 특검도 못하겠다고 한다. 이대로 정부에서 6월을 끝으로 특조위 활동기간도 끝났다고 못 박으면 마지막 기대치가 무너진다. 지금으로선 진상규명이 집요한 방해로 물 건너 가는 것 아닌가, 피해자들의 절망이 다들 깊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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