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2년, 대한민국 정부의 '실종'

정용인 기자 입력 2016. 4. 9.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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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년이 지나도록 아직 먼 진상규명의 길… 세월호 참사의 비극은 진행 중
진도 앞바다에 침몰해 있는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면 그날 사건의 진상은 규명될 수 있을까. 단원고 2학년 4반 최성호군의 아버지 최경덕씨가 동거차도에서 세월호 인양작업을 지켜보고 있다. / 김정근 기자

1990년생 용혜인씨는 올해로 만 26세다.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6살 때 가족과 함께 안산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평범한 학생이었다. 고3이었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때 친구들이 ‘야자’를 빼먹고 광화문에 나갈 때도 그는 조용히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만난다. 용씨에게는 세월호 사건이 그랬다. “4월 16일은 시험 보기 전 주였어요. 아침 일찍 학생회실에 가서 휴대폰으로 트위터를 봤는데, 단원고 학생들이 탄 수학여행 배가 침몰했다는 거예요. 전원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업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다시 보니 그게 오보였다는 겁니다.” 그리고 일주일. 시험을 앞두고 밤 늦게 시험공부를 하다가 세월호 유족들이 진도대교를 행진하려고 했고, 경찰이 그걸 막으려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건 뭐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거창한 어떤 것은 아니더라도 친구들과 모여서 노란리본이라도 나눠줄까 생각을 했습니다.” 배에서 선원이 학생들에게 했다는 ‘가만히 있으라’는 손팻말을 들고 하는 침묵행진을 제안했다. 제안 글은 청와대 자유게시판에 올렸다. 바로 삭제되었지만 이튿날, 서울시청 광장 분향소에는 용씨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200여명이 모였다. 용씨는 <주간경향>에 이렇게 말했다. “결국 가만히 있지 않고 뭔가 하겠다는 것인데,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사태의 본질을 더 직설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어요.”

침묵행진은 계속되었다. 2014년 5월 18일, 그는 광화문 광장에서 연행됐다.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경찰서에 가봤다. 다음날 아침. “고심 끝에 해경을 해체하기로 했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TV중계를 경찰서 유치장 철창 너머로 봤다. 용씨는 그때도 대학교 4학년, 지금도 대학교 4학년이다. 타이틀이 하나 추가되었다. 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1번.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했어요. 신림동 고시촌에 방을 얻었어요. 아직 1심이 안 끝나 엄밀히 말해 전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공무원으로 뽑아줄 것 같지도 않고, 먹고사는 욕심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지금이 좋아요. 무엇보다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4·16 이후 ‘잘 살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을 버리고 하고 싶은 일과 말을 마음껏 하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그게 저에겐 4·16 이전과 이후, 가장 큰 변화입니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 한국 사회가 달라져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뭐가 달라졌을까. 기자는 지난 2월, 크루즈선을 타고 가족과 함께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와 한국의 동해항, 일본의 돗토리현을 오가는 이 배는 화물과 승객을 한꺼번에 나르는 화객선이다. 세월호도 화객선이었다. 출항 직전, 선실 내의 스피커에서 “구명조끼 착용법과 비상시 활동요령에 대한 안내 말씀을 드리겠다”는 선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선실 내에 TV가 있으면 TV를, 없으면 복도의 TV를 통해 안내를 받으라는 메시지가 나왔지만 승객들 중 이 안내방송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복도에 모여 앉은 승객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딱히 제재도 없었다. 갑판에 설치된 구명정을 유심히 봤다. 주요 접합부는 녹이 슬어 있었고 먼지가 쌓여 있었다. ‘비상상황’이 발생한다면 과연 제대로 동작하는 걸까.

한국에서는 세월호를 기점으로 이전과 이후를 나눈다면, 일본에는 3·11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에 이은 가장 큰 참사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다. 일본 도쿄전력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일보 형태로 매일의 작업상황이 올라온다. 4월 8일만 하더라도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구내 1호기, 2호기 방수로 샘플링 결과’라는 제목의 자료와 ‘후쿠시마 제1원자력 샤프도렌, 지하수 드레인 물 배수에 대한 샘플링 결과’라는 자료가 올라왔다. 4월 7일자 자료엔 ‘도수벽 동결 개시 상황’이라는 제목으로 4월 5일 찍은 작업현장 사진이 PDF파일 형태로 올라와 있다. 보통 오전 11시 기준으로 작업현황을 정리하는데, 계속 진행된 작업 이외에 새로 시작한 작업은 밑줄을 치는 형태로 전날까지 작업과의 차이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사건을 일으킨 선사, 청해진 해운은 2014년 5월 부도처리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재판이나 자료, 관련 소식을 아카이브하는 공식사이트는 없다. ‘세월호 침몰사고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는 1주기도 되기 전인 2014년 11월 17일 해체되었다. 후속작업을 맡은 쪽은 해양수산부다. 해양수산부는 세월호 사건과 관련한 2개의 관련 팀이 있다. 세월호 배상 및 보상지원단과 세월호 인양추진단이다. 세월호 배상 및 보상지원단의 신청접수는 지난해 9월 30일까지 완료되었고, 현재는 2주에 한 번꼴로 관련 심의위원회를 진행하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홈페이지에서 세월호 인양추진단의 최근 활동자료를 찾아보면 “세월호 선체 부력 확보작업에 착수했다”는 지난 3월 31일 자료가 마지막이다. 그 전 자료는 “세월호 유실 방지 사각펜스 설치작업을 3월 2일부터 착수할 예정”이라는 2월 29일 자료다. 특조위에 세월호 선체 절단작업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는 <경향신문> 보도에 대한 해명자료(3월 8일자)를 덧붙인다고 하더라도 한 달에 1~2건의 자료만 발표하고 있다. 현재 인양작업은 상하이 샐비지라는 중국 업체가 하고 있다. 예컨대 세월호의 침몰과 관련해 앵커와 관련된 의혹이 제기된다고 치자.(실제로 그런 의혹이 일각에서 제기된 바 있다) 현재의 공개된 정보 중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있을까.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특조위라는 전담조직이 있고, 특조위 청문회 준비를 돕다 보니 업데이트가 늦은 것”이라며 “날씨가 좋아져 현장작업이 역동적으로 돌아가면 보다 자주 브리핑 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지난 3월 중순. 책 한 권이 출간되었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재단법인 진실의 힘 세월호 기록팀이 펴낸 책이다. 책의 시작은 단원고 학생 고 박수현씨의 아버지 박종대씨였다. 재판기록과 검찰 수사기록 15만장과 3테라바이트가 넘는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 ‘세월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책의 서술은 감정이 절제되어 있다. 책에는 단원고 학생들이 카카오톡 ‘반톡’(학급단위로 만들어져 있는 단체 채팅방), 학교 동아리, 부모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가 시간대별로 정리·소개되어 있다. 세월호로부터 마지막으로 발송된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 엄마 아빠… 배가 많이 기울어졌어요, 보고 싶어요 ㅠㅠ -90% 이상, 기울었데 -너무 무서워.” 10시17분, 박영란 학생이 보낸 메시지다. 박영란 학생은 사고 6일 뒤인 4월 21일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책은 안타까운 순간들을 기록하고 있다. “양승진 교사(57· 실종)는 식당 입구의 소파에서 학생들과 앉아 과자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배가 왼쪽으로 확 기울자 양 교사의 몸이 붕 뜬 채 안내데스크 옆 로비 출입물을 순식간에 통과해 갑판 밖 바다로 떨어졌다. 화물차 기사 심상길씨(55·생존)도 밖으로 튕겨나갔지만 가까스로 갑판 난간에 매달렸다.” 바다로 떨어진 양승진 교사는 실종자 9명 중 한 명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세월호 선체 인양작업이 마무리된다고 해도 그의 시신을 발견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른 8명의 시신이 발견될 가능성도 그리 높지는 않다.

심씨를 비롯한 화물차 기사들은 대부분 생존했다. 평소 제주와 인천을 오가는 노선을 여러 번 이용한 적이 있는 이들은 당시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비정상적인 것을 알았다. 특히 식당 입구 로비에 있던 화물차 기사들은 자력구제에 나섰다. 책에 따르면 이들은 “배가 기울어져 있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 것 같아 가만히 있었던” 다른 승객들, 학생들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오전 9시42분, 이들 3층 좌현 쪽 승객이 탈출한 직후 여객부 강혜성은 “현재 위치에서 이동하시지 마시고 안전하게 대기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방송한다. 선장과 갑판부 선원이 탈출한 9시45분 시점에 다시 강혜성은 “현재 위치에서 안전하게 기다리시고,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반복해 방송한다.

3월 29일 오후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2차 청문회에서 참고인으로 출석한 희생자 유가족이 세월호 인양과 관련된 질문에 답변을 하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정지윤 기자

기자는 세월호 사건이 난 뒤인 2014년 5월 말, 다른 대형참사 현장의 ‘그 후’를 취재했다. 그 중 하나가 경기도 화성의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이었다. 참사 현장에서는 불법 증축한 오토캠핑장이 운영 중이었다. 오토캠핑장을 방문한 손님들은 대부분 참사가 일어난 곳이 ‘그곳 근처’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묵은 곳이 그 시설의 일부라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오토캠핑장을 운영하는 주인은 “참사가 일어난 곳은 오토캠핑장이 아니라 폐쇄된 옆 오토캠핑장 자리”라고 주장했다. 이 취재 중 들었던 가장 인상 깊은 말은 씨랜드 사건으로 자녀를 잃은 유족이 말한 세월호 사건이 처리될 방향에 대한 ‘예상’이었다. “우리 때와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결국 이리저리 다 빠져나갈 것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이유다. 법을 지키면 뭐하나.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지키면 죽고 안 지키면 사니. 국가에서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따르지 않아야 사는 것 아니냐.”

지난해 세월호 1주기를 즈음해 <세월호가 우리에게 묻다: 재난과 공공성의 사회학>이라는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책은 인상적인 연구결과를 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0개국의 공공성 및 위험 관련 지표를 분석해 나라별 순위를 매긴 결과 한국이 최하위를 차지했다. 공공성이 높은 국가는 위험수준이 낮고 위험관리 역량은 높다. 최하위를 차지하는 한국은 반대다. 책에 저자로 참여한 구혜란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공공성의 문제는 결국 신뢰·투명성의 문제인데, 신뢰와 투명성은 무엇보다도 정보를 가지고 있는 측에서 보장해야 한다. 지난해 메르스 사태 때도 세월호 때와 똑같은 패턴의 문제가 발견되는데, 일반인들의 의료쇼핑과 대형병원 선호가 메르스 사태의 확산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일반사람들은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택한 것이다. 시스템이 안 돌아간다면 그런 시스템의 어디가 고장 났는지 면밀한 진단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데, 결국 욕할 사람을 찾아내 책임을 전가하는 식이다.” 결국 문제는 정부다. 구 교수는 ‘사건을 조사하고 검토하는 과정에서의 차이’의 예로 2005년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해 사건에 대한 정부 조사를 들었다. “발단부터 처리하는 과정까지 정말 디테일하게 조사했다. 미국 의회의 경우 상원에서도 그렇고 하원에서도 그렇고 수백번의 청문회, 수만명의 사람들을 동원해 질문하고 답변을 한 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와 백서를 냈다. 이를테면 카트리나 사건 뒤 쓰레기 수거가 안 되었는데, 배치는 어떻게 하고 자원봉사자는 어떻게 했는지, 어디서 조직이 안 되었고, 이것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를 해야 한다는 식인데, 우리는 배가 급회전하니 넘어졌다에서 끝나는 것이다. 시스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의 직접적 원인밖에 규명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선원 재판과 해경 재판만 보면 세월호 침몰의 원인은 아직 나오지 않은 건 맞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지난해 세월호 재판기록을 책으로 펴낸 오준호 작가의 말이다. 지난 3월 28일부터 이틀간 열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2차 청문회에 참석한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정국을 뒤엎을 ‘폭탄’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언제든 터질 폭탄이라는 걸 청문회는 보여줬다.” 그가 말한 ‘폭탄’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세월호 참사 이후에 ‘아무것도 밝혀진 것은 없다, 변한 것은 없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해요. 진실의 조각은 많이 나왔고, 참사의 아웃라인은 이미 나왔어요. 그 조각들을 이어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은 그때그때 만들어내야 합니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단단한 디딤돌을 놓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어떤 것이 밝혀졌고, 새로 발견된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함께 해석하는 자리나 기회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것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지금까지 한 게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규명되지 않은 ‘진실’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청와대까지 이르는 윗선의 책임이다. 그는 이제는 유가족이 양보해야 할 시점이 아니냐는 사회의 태도가 잔인하고, 사회의 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유가족의 심정을 빗대 말한다면 배가 아직 물속에 있으니 인양을 해야지, 배한테 너희가 스스로 떠올라와서 살아가 주시라고 하는 것, 얼마나 잔인한 생각입니까.”

오 작가를 만난 지난 6일 저녁, 안산에서는 그가 사회를 보는 작은 행사가 열렸다. ‘고마워요, 기억해요’라는 주제로 열린 4·16 2주기 안산시민 토크 마당이었다. 참석한 사람은 담담히 지난 2년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월호 다큐멘터리 영화 <나쁜 나라> 김진열 감독은 ‘처음 참사현장에 카메라 300대가 있을 때’ 자신과 같은 사람의 존재가 큰 도움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참사가 난 뒤 5월 중순부터 현재의 분향소가 자리잡고 있는 가족협의회에 출퇴근 개념으로 오갔다. 관계가 쌓이면서 영화의 촬영은 시작됐다. 김 감독이 관심을 갖는 것은 미디어교육이었다.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가 카메라를 활용해 스스로를 말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그의 작업방식이다. 세월호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당사자 스스로 이야기를 할 때 울림이 다른 것 같아요. 만약 제가 가족분들을 기록했다고 하더라도 외부인이 볼 수 있는 그림이 있고, 가족 당사자들이 볼 수 있는 그림은 달랐던 것 같아요.” 가족들이 세월호특별법 관련으로 국회 농성을 시작하면서 가족들은 스스로 카메라 스위치를 켜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호연 작가를 비롯한 세월호 작가 기록단이 유가족 형제자매와 더불어 생존학생 11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충분한 설명과 동의절차를 거친 뒤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데서 비롯됐다.

<주간경향>은 지난해 세월호 1주기를 맞이하여 박근혜 정부가 놓친 ‘골든타임들’에 대한 이야기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앞서 <세월호 그날의 기록> 책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가 300여명을 가둔 채 완전히 뒤집혀 물속으로 가라앉던 시각, 해경청장 김석균에게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과 장비, 또 인근의 모든 구조선박까지 신속하게 총동원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 해경 특공대도 투입해서 여객선의 선실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서 단 한 사람의 인명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 원론적인 지적이다. 책에 따르면 청와대가 승객에 대해 처음으로 궁금해 한 시각은 10시52분이었다.(321쪽) 첫 보고 후 7시간 후에 나온 대통령의 말은 “구명조끼를 학생들이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 힘듭니까?”였다. ‘놓쳐버린 골든타임’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존재했다. 8월 14일 교황 방한, 10월 29일 새해 예산안 시정연설을 위한 박 대통령의 국회 방문 현장…. 그리고 다시 1년. 세월호 사건에서 국가의 역할은 실종했다. 특별조사위가 발족했지만 여당 측 위원이 빠진 반쪽짜리 특조위가 되었다. 이번 총선 이후 세월호 특조위의 ‘운명’ 역시 불확실한 상태다. 이번 2차 청문회에 대해 오 작가는 다음과 같이 소감을 밝혔다. “어느 정도 현대사회의 특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드는 의문은 ‘왜 이렇게 보고에 미쳐 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청문회에 참석한 김석균 해경청장은 아예 ‘본청의 역할이 상부에 보고하는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책임은 누가 지는 걸까요. 결국 이 정부의 시스템은 권력자에게 상황보고를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시스템입니다. 책임은 주지 않고 보고만 하면 되는.”

2년 전 4월 16일은 수요일이었다. 이번은 토요일이다. 기억과 약속을 주제로 한 걷기대회를 비롯한 다양한 추모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진상규명의 길은 더 먼 과정일 것이다. 세월호 사건, 그리고 이 참사에서 정부의 역할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

‘진실은 인양되지 않았다.’ 유가족과 4·16 관련 단체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비유적인 표현이다. 재판에서 세월호 침몰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것은 솔레노이드밸브 고장 또는 조타 실수였다. 선원 재판은 이 가설들을 기각한 채 마무리되었다. 선체를 인양한다고 규명될지는 알 수 없다. 9명의 실종자도 돌아오게 될지 불확실하다. 유가족들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월호의 비극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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