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킹은 공격수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훈장'임을 증명한 황연주

che 2016. 3. 12.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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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6. V-리그 여자부 ‘기록의 여왕’ 황연주(30·현대건설)가 2005년 프로 출범 이후 12년간 쌓아온 공격득점 개수다. 기록의 여왕이란 수식어답게 당연히 여자부 1위. 황연주는 공격득점뿐만 아니라 통산득점(4484점), 후위공격 득점(980점), 서브득점(380점) 부문에서도 당당히 순위표 맨 윗자리를 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점 하나. 3726개의 공격득점을 올리는 동안 황연주의 공격이 블로킹 차단된 것은 몇 번일까. 정답은 621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듯, 1만319번의 공격 시도 중 621번을 상대 블로커에게 셧아웃 되면서도 멈추지 않고 ‘공격 본능’을 쏟아 부었기에 공격득점 3726개라는 찬란한 기록이 탄생할 수 있었다. 어쩌면 공격수들에게 블로킹 셧아웃은 ‘슬프도록 아름다운 훈장’일지도 모른다. 황연주는 내년이면 V-리그 남녀부 통틀어 최초로 공격득점 4000개 돌파도 유력하다. 물론 이를 위해선 블로킹을 두려워 하지 않는 강한 마음가짐이 필수다.

현대건설과 흥국생명의 2015~16 V-리그 여자부 플레이오프(3전2승제) 1차전이 열린 11일 수원체육관. 황연주는 이날도 현대건설의 주전 라이트 공격수로 선발 출장했지만, 1세트부터 상대 블로킹에 힘든 시합을 치렀다. 1세트에만 4개의 블로킹을 당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4개 모두가 흥국생명의 2년차 에이스 이재영(20)이었다. 특히 26-27로 뒤진 듀스 상황에서 시도한 공격마저 이재영에게 잡히며 1세트를 내주고 말았다.

이재영을 보면 10년 전 폭발적인 타점으로 V-리그 코트를 호령하던 황연주가 연상된다. 두 선수 모두 1m77, 1m78로 비교적 단신이지만, 폭발적인 타점과 빠른 스윙 스피드, 빠른 발을 앞세워 상대 코트를 폭격하는 모습은 묘하게 닮았다.(물론 황연주는 왼손잡이 라이트, 이재영은 오른손잡이 레프트로 포지션은 다르다) 프로에서 12년을 뛰는 동안 수차례 무릎 수술을 받아 어쩌면 다시는 전성기 시절의 점프력을 재현하지 못할 황연주 입장에선 자신의 10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은 후배에게 한 세트에 네 번이나 블로킹 셧아웃 당한 게 자존심이 상할 수도, 멘탈이 무너질 수도 있었을 터. 실제로 1세트에 4점을 기록한 황연주는 2세트엔 2점에 그쳤고, 2세트까지 공격 성공률도 20%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황연주는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끝까지 코트에 기용한 양철호 감독과 라이트에 고정된 공격보다 이리 저리 공격 위치를 바꿀 수 있도록 토스를 올려준 세터 염혜선의 도움으로 3,4세트엔 본 모습을 되찾았다. 황연주는 3세트 블로킹 2개 포함 팀 내 최다인 6점을 올렸고, 4세트에도 공격으로만 5점을 올리며 팀 승리에 힘을 보탰다. 이날 황연주의 최종 성적표는 블로킹 2개 포함 17득점. 한때 20%대 초반에 머물렀던 공격성공률도 35.71%로 끌어올렸고, 범실은 단 한 개도 없었다.

현대건설은 초반 난조를 딛고 제 모습을 보여준 황연주와 갑작스런 허리 부상을 딛고 팀내 최다인 21점을 올린 양효진의 ‘쌍끌이 활약’을 앞세워 흥국생명을 3-1(26-28 25-16 25-15 25-22)로 꺾고 기선을 제압했다. 올시즌 전까지 11번 열린 여자부 플레이오프에서 1차전 승리팀은 모두 다 챔피언 결정전에 진출했다. 100% 확률의 고지를 점한 셈이다.

정규리그 때 입버릇처럼 “연주가 15점 이상만 해주면 우리 팀은 이긴다”고 말하곤 했던 양철호 감독. 8일 포스트시즌 미디어데이에서 플레이오프에서 미쳐줬으면하는 선수로 황연주를 꼽기도 했다. 양 감독은 경기 뒤 “연주가 80% 정도 미쳐준 것 같다. 좀 더 미쳐줬으면 좋겠다”면서 “교체도 고려했지만, 우리 팀에서 포스트시즌 경험은 연주를 따라갈 선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제 몫을 해줄 거라 생각했고, 그 믿음에 보답해줬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경기 뒤 수훈선수로 인터뷰실에 들어선 황연주에게 바로 1세트에 대한 질문이 날아왔다. 민망한 듯 씩 웃은 황연주는 “공격이 걸릴 수도 있죠. 그래도 굴하지 않고 이겨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거기에서 주눅들었다면 오늘뿐만 아니라 2차전에서도 힘들었을 텐데, 감독님이 끝까지 믿고 맡겨주신 덕분에 그 믿음에 부응하기 위해 더 노력했다”라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해도 속은 쓰릴 법도 하지만, 황연주는 당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대범한 모습도 보였다. 기자회견에 함께 들어온 세터 염혜선이 “1세트 때 이길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내주고 나니 2세트부턴 악에 받쳐서 하게 되더라. 열도 좀 받더라”라고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황연주는 “혜선아, 미안해. 내가 많이 걸려서 나한테 열 받았나봐요. 그 뒤로 제가 더 열심히 했어요”라고 말했고, 순식간에 인터뷰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선배 언니의 ‘셀프 디스’에 멋쩍어진 염혜선은 “언니한테 화난게 아니라니까요”라면서 “연주 언니를 믿었어요”라고 말했다.

2010~11시즌 황연주가 현대건설로 FA이적한 뒤 염혜선과 황연주는 여섯 시즌 동안 손발을 맞춰왔다. 경기 초반 부진하던 황연주의 공격력을 되살려낸 것도 염혜선과의 호흡 덕분이었다. 염혜선은 빠른 발로 이동 공격에 일가견이 있는 황연주를 중앙으로 파고들게 하는 등 공격 위치를 바꿔가며 상대 블로커들을 교란시켰다. 염혜선은 “경기 초반 언니에게 올려주는 내 토스가 너무 라이트쪽에만 치우쳤다. 상대가 움직이는 블로킹을 하도록 연주 언니의 공격 위치를 수시로 바꿔갔다”면서 “언니가 걸린 공격들은 사실 제 토스미스도 있었다. 더 공격하기 쉽게 올려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황연주는 챔피언 결정전 우승만 4차례나 경험할 정도로 큰 경기 경험이 풍부하다. 그런 그녀에게도 포스트시즌 경기가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란다. 황연주는 “포스트시즌 경험이 많다고 안 떨리는 것은 아니에요”라면서 “어느 누가 제게 뭐라하더라도, 정말 제 욕을 많이 한다고 할지언정 저는 제게 주어진 역할만 최선을 다하려고 해요. 조금 부진했다고 해서 그날로 은퇴를 하는 것도, 배구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까요”라고 답했다. 이어 “2차전에도 블로킹에 걸려도 신경쓰지 않고 다시 때릴 거에요. 다음 경기에선 (염)혜선이가 커버해주겠죠”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동료를 믿으며 본인에게 주어진 역할에만 최선을 다 하겠다는 그녀의 대답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본 베테랑다운 품격이 느껴졌다. 

수원=남정훈 기자 che@segye.com
사진=발리볼코리아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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