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해치상 밑에 와인 72병이 묻힌 사연
[오마이뉴스유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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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환영한다’는 의미의 <영추문>, 경복궁 4개 대문 중 유일하게 콘크리트대문이다. |
ⓒ 유영호 |
그런데 이 영추문이 있는 경복궁 서쪽담장은 1920년대 여러 풍파를 맞게 된다. 총독부는 1923년 10월 5일 경복궁 내에서 조선부업품공진회의를 개최하기로 했고, 이에 맞추어 출입구인 영추문까지 전차를 개통시키기로 했다. 이때 그 선로를 곡선으로 놓으려고 경복궁의 모서리 '서십자각'을 철거하였다. 이 공사로 말미암아 당시 광화문 해치마저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리는 수난을 겪은 것이다.
그 뒤 '동십자각' 방향으로도 전차선로가 부설되기는 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광화문 쪽에서 안국동으로 곧장 이어지는 직선선로만 개설되는 덕분에 동십자각은 철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만약 전차선로가 안국동이 아닌 삼청동 방향으로 부설되었다면 동십자각 역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쁨도 잠시일 뿐 1929년 5월 개최된 조선박람회를 맞이하면서 동십자각 역시 수난을 겪었다. 당시 건춘문 쪽으로 옮겨졌던 광화문이 박람회 출입문으로 사용되면서 약 200만 명으로 예상되는 관람자들의 출입편의를 위하여 현 삼청로를 확장했고 동십자각은 궁궐의 담에서 분리되어 마치 양자 보낸 자식처럼 경복궁 담장에서 잘려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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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 순종 승하 이틀 뒤 붕괴된 영추문, <매일신보> 1926년 4월 29일자 |
ⓒ 매일신보 |
1910년 공식적으로 식민통치에 들어간 일제는 불과 5년 뒤 한일합방이 조선 근대화에 도움이 되었음을 선전하기 위하여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행사 장소였던 경복궁 내 전각들을 철거하고 새로운 일본식 건물들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부터는 총독부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하였으니 경복궁은 그야말로 연중 무휴의 공사판이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자재들이 경복궁 내로 반입되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전차로 옮겨졌는데 바로 그 전차 종점이 영추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선로는 경복궁 서쪽 담장을 따라 바짝 붙어 개설되어 있었으니 결국 누적되는 진동에 담장과 문루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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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장 전경도(1915) |
ⓒ 김영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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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술국치 후 불과 5년 뒤 조선의 법궁을 헐어내고 열리는 제국주의 산업화 전시장에 몰려든 조선인들 |
ⓒ 총독부 사진엽서 |
하지만 당시 광화문조차 그랬던 것처럼 이 역시 콘크리트로 복원해 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래 위치와는 달리 남쪽으로 50미터쯤 아래 복원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참고로 경복궁의 대문은 이곳을 비롯하여 광화문, 건춘문, 신무문 등 모두 4곳인데 광화문이2010년 목재로 복원되면서 이제 콘크리트 대문으로 남은 것은 이곳 영추문이 유일하다.
광화문 앞 '해치', 그 의미와 본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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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미국외교관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Willard Dickerman Straight)가 찍은 사진으로 해치의 본래 위치를 알 수 있다. |
ⓒ 윌러드 디커맨 스트레이트 |
해치가 불을 먹어 치운다는 전설로 인하여 풍수지리상 화산(火山)인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세웠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것은 대원군이 경복궁 중창 때 왕권강화를 위한 상징성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왕이 성군임을 칭송하는 의미와 함께 궁궐에 들어올 때 마음을 가다듬고 공손한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곳부터 경복궁은 시작되는 것이다. 일단 궁궐에 오는 사람은 이 해치상이 놓은 곳에서 안쪽으로는말이니 가마 등 탈것에서 내려서 마음을 가다듬고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1890년대 사진에는 해치 앞에 돌이 있었던 것은 이곳부터 탈것에서 내리라는 하마(下馬)표시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또 고대부터 내려오는 상상의 동물로 본래 뿔이 하나고 성품이 충직한데,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서로 따지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무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정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탄핵하는 '사헌부' 대문앞에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사헌부 관헌들은 치관(?冠)이라 하여 해치가 장식된 모자를 썼으며, 대사헌의 관복 흉배에 해치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반면 동급의 다른 관헌들은 학을 수놓았다.
이런 의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국회의사당, 대검찰청, 사법연수원 등에도 해치상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국회 해치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국회 것은 1975년의사당 준공 무렵 해태제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당사가 약 3천만 원을 들여 조각하여 기증했는데 이때 ㈜해태주조에서 생산하는 '노블와인'이라는 상표의 백포도주를 바로 그 해치상 아래 각각 36병씩 총 72병을 묻었다고 전한다.
참고로 눈이 나쁜 사람을 우리는 '해태 눈깔'이라며 비아냥거린다. 이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궁궐 앞에 서 있으면서도 탐관오리가 들끓는 현실을 비꼬는 의미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여전히 우리 사회의 사법체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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