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 탕진해가며 값비싼 '황금 그림' 창안한 까닭은?"

2016. 3. 7.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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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금으로 그림 그리는 화가 김일태씨

금으로 그림 그리는 화가 김일태씨

한때 그는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아내에게도 이혼을 당했다. 가족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경기도 양평에 스며들었다. 10년 동안 그곳에서 ‘칼’을 갈았다. 그가 추구한 것은 아무도 그리지 않은 그림이었다. 바로 금으로 그리는 것이다. 순금 24케이(K)로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림을 그린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은 중년의 남자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찾아간 예술의 길은 고독했다. 환갑이 되어서야 세상은 그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오는 5월12일부터 8일간 영국 런던의 사치 갤러리는 그의 작품 30점을 단독 전시한다.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치 갤러리에서 한국 화가로는 처음이다. 국내보다 국제 화단에서 먼저 그를 인정한 것이다. 그는 “기존의 어떤 그림과, 그 어떤 화가와 비교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말한다. 비장하다. 그리고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세계 최초의 유일무이한 ‘금화(金畵) 아티스트’로 불리는 김일태(61) 화백이다.

강남 개발 덕에 20대 ‘벼락부자’로
미술교사 어머니 격려에 ‘화가’ 도전
37살에 미국 유학…‘유화’ 한계 절감



“나만의 영원한 그림 남기고 싶어”
10년간 칩거하며 황금물감 등 개발
오는 5월 런던 사치갤러리 개인전

인간은 오래전부터 금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금이 너무 비싸니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얇은 금박지를 붙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김 화백은 달랐다. 순금을 재료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새로운 그림을 창조하고자 했다.

“유화나 수채화는 아무리 열심히 그려도 서양의 화가를 따라가는 데서 벗어날 수 없었어요. 나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게 예술가의 길이니까요.”

장미

어릴 때부터 그는 그림을 좋아했다. 어머니(이정숙)가 초등학교 미술교사였다. 하지만 그가 미술의 길을 가기엔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 충남 공주에서 중·고교를 졸업하고 충남대 농대를 나왔다. 서울로 올라와 부동산에 손을 댔다. 1970년대 후반 강남 부동산 열풍이 일어나기 전 사놓은 땅이 금싸라기가 됐다. 20대 후반 그는 이미 수십억대 부자가 됐다. “돈을 벌고 나니 어릴 적 미술에 대한 꿈이 되살아났어요.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 겸 이민을 갔어요.”

그는 92년 37살에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샌프란시스코 아트 스쿨에 입학해서 6년간 미술을 공부했다. 뒤늦게 배우는 미술은 그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한계를 느꼈다. 이미 그려놓은 작품을 뛰어넘기 어려웠다. 이민 생활을 접고 귀국하는 길에 세계의 유명 미술관을 순례했다. 거장들의 명작을 보며 결심했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저 미술관에 걸리게 하리라.”

귀국해서부터 그는 금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쉽지 않았다. 순금을 화학물질과 혼합해 캔버스에 바르는 순간 까맣게 부식됐다. 그는 천연오일에 식물 6~7가지를 갈아 금을 섞어 부식되지 않는 황금 물감을 만들었다. 또 그 황금 물감을 캔버스에 달라붙게 만드는 천연 접착제를 개발했다. 한국에서 나는 물질 다섯 가지를 혼합해 만들었다. 모두 직접 만든 재료들이다. 그의 금화는 평면적이 아니다. 입체적이다. 명암이 뚜렷하다. “캔버스에 회화와 조소, 조각의 느낌이 모두 나도록 그리고 싶었어요. 바로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그림이니까요.”

예수의 십자가상

그가 개발한 황금 물감은 2개월간 숙성을 시켜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먼저 캔버스에 황금 물감을 7번 덧입혀서 금 캔버스를 만든다. 한번 칠하고 말리는 데 보름씩 걸린다. 금화를 그릴 캔버스를 만드는 데만 3개월 이상이 걸리는 셈이다. 그 위에 황금 물감 덩어리를 붙여 60~70도의 저온 가마에 넣어 48시간 동안 젤리 상태로 굽고, 형상을 조각한 뒤 다시 마무리 칠을 3차례 한다.

“유화는 시간이 흐르면 균열이 생기고 변색이 되는 단점이 있는데, 순금으로 만든 금화는 천년이 지나도 변질이나 변색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금으로 만드니 재료비가 비싸다. 그의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 것도 금화를 그린다며 재산을 탕진했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누구도 안 만나고, 혼자 라면 끓여 먹으며 금화를 연구했어요. 누구도 제가 금화를 완성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는 사랑의 상징인 장미와 어머니상, 그리고 용·말·돼지 등 상서로운 동물을 주로 그린다. 가톨릭 신자인 그는 예수의 십자가상 같은 성화도 즐겨 그린다. 당연히 그의 금화는 비싸다. 보통 억대다.

마침내 2011년 그는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화랑 관계자들은 금속탐지기를 동원해 그의 그림이 정말 금으로 그린 것인지 검증하기도 했다. 그는 이미 상하이, 홍콩, 두바이, 런던,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20여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황금을 좋아하는 중국 등 중화권에서 그의 그림은 상한가를 친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그의 그림이 세계 미술계에 금빛 한류를 일으켰다고 소개했다. 2012년 가수 싸이는 그의 금화를 6점 구입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가수 마돈나,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에릭 슈밋 구글 회장 등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미국 베벌리힐스에서 연 전시회에는 가수 보이 조지, 배우 데미 무어, 영화 <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이 찾아와 그의 금화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제 그는 사회복지기관에 그림을 기증도 하고, 수익의 10%를 저소득층을 돕는 데 기부한다.

그는 서울 압구정동에 전용 전시장인 오로갤러리도 열었다. 단 한 점도 다른 화랑에 작품 판매를 위탁하지 않았다고 했다. “화가의 자존심입니다. 미술인답게 살고 싶었습니다.”

김 화백은 사치 갤러리의 단독 초대전을 “대학로에서 엑스트라였던 무명의 배우가 하루아침에 아키데미상을 받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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