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타계

장지영 기자 2016. 3. 6.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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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고음악 보급에 앞장..지난해 12월 건강 문제로 은퇴

오스트리아 출신 세계적인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지난 5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향년 86세.

아르농쿠르의 가족은 6일 오스트리아의 APA 통신사를 통해 “아르농쿠르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숨을 거뒀다”고 발표했다. 아르농쿠르는 앞서 지난해 12월 6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건강 문제 때문에 은퇴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는 당시 친필 서한에서 “체력적인 문제로 연주 일정을 취소하는 게 불가피해졌다”면서 “관객 여러분과 깊은 유대 관계를 통해 행복한 선구자적 공동체를 이뤘다”고 팬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 귀족 출신인 그는 1929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줄곧 성장했다. 빈 국립음대를 졸업한 후 1952년 카라얀이 이끌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1969년까지 첼로 주자로 활동했다.

대학 시절부터 고음악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1953년 아내 알리스 아르농쿠르, 친구인 레온하르트 멜쿠스 등과 함께 고음악 연주단체인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을 창단했다. 그리고 바흐부터 모차르트에 이르는 수많은 레퍼토리를 연주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연주와 병행에 <바로크음악은 ‘말'한다(원제 ‘언어로서의 음악’)> 등 고음악에 대한 저서들도 다수 집필했다. 그의 이름은 고음악 연주의 대명사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젊은 시절엔 원전연주 이외엔 비판적을 입장을 보였지만 점차 절충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됐다. 그래서 자신을 ‘정격연주’로 분류하는 것을 싫어했다. 고음악에 대한 단순한 복원이 아닌 당대 정신을 복원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재해석을 내어 놓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점차 지휘자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베를린필과 빈필 등 현대 오케스트라를 자주 지휘했으며 현대음악을 녹음하기도 했다. 지휘할 때 맨손으로 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맨손의 지휘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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