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주장보다 상식적인 목소리' 인문사회 서적의 지형도가 바뀐다
[경향신문] 독자들이 찾는 인문사회 서적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과거엔 개혁적 노선의 선명한 주장을 담은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면, 최근엔 상식적이면서 과격하지 않은 개인적 관점의 책들이 많이 팔리고 있다.
최근 정치 서적 출간을 준비 중인 한 출판사의 팀장은 “요즘은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생각되는 책보다는 중도적 관점에서 건강한 개인으로 현상을 바라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며 “제목이나 표지에도 그런 부분을 신경써서 디자인하게 된다”고 밝혔다. 실제 ‘이코노미스트’의 전 한국 특파원 다니엘 튜더의 <익숙한 절망, 불편한 희망>,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 언론인 권석천의 <정의를 부탁해> 등으로 이어지는 ‘조용한 베스트셀러’ 흐름에서 이 같은 트렌드 변화가 읽힌다.
이들 책에는 젊은 독자들의 공분을 추동할 수 있는 사회 부조리를 폭로하거나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이 담겨 있는 게 아니다. 일상적 소재나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 사태들을 놓고 저자 나름의 관점에서 사회비평을 하고 있다. 그 내용들이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다.
반면 필자 개인의 선명한 주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논객’ ‘오피니언 리더’들에 대한 관심은 다소 줄어들었다고 출판계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강준만 교수, 박노자 교수, <고래가 그랬어>의 김규항 발행인 등이다. 논객들에 대한 소구가 줄어든 것은 개개인이 생존 투쟁에 매달리느라 인문사회계 전반에 논쟁의 장이 사라진 것이 한 이유로 꼽힌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박태근 MD는 그 사례 중 하나로 한국을 비평한 외국인 필자 중 박노자(귀화 전)와 다니엘 튜더를 비교했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당신들의 대한민국> 등을 통해 한국 사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를 전달했다. 반면 튜더의 이야기는 독자들이 몰랐다기보다는 잊고 있었던 한국 사회의 이면들이다. 튜더는 최근 책에서 “성공한 사람을 지나치게 떠받드는 한국 문화” 때문에 한국 정치가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대선 후보들을 놓고 인기 경쟁만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러한 출판 흐름의 배경엔 거대 담론의 실종, SNS 시대의 지식 유통, 야당의 부진 등도 있다는 분석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최근 몇 년간 ‘얘기해봤자 바뀌지 않는’ 사회 상황을 학습한 한국의 독자들이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더 냉소적인 경향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며 “사회가 바뀔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에 사회과학 서적에서도 큰 이야기보다는 ‘작지만 실속 있는’ 내용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밝혔다.
출판사 ‘동아시아’의 한성봉 대표는 “전통적으로는 전혀 안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칼럼 모음집’이 이례적으로 팔리는 상황”이라며 “과거엔 모든 담론을 오피니언 리더들이 끌고 갔다면, SNS 시대가 되면서 담론의 유통에 모두가 참여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독자들이 일반적인 삶과 동떨어지지 않은 글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공감대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독서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데 따른 문화 후퇴 현상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지금은 독서 인구가 워낙 줄어 책읽는 사람들의 취향이 소프트해진 경향은 확실히 있다”며 “여기에 이른바 진보 영역에서 신진 저자들이 활발하게 나오지 않는 것도 이유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심혜리 기자 grac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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