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 살아봤니? 16살 민수 왁자한 성장담
[한겨레] 국가부도 전 아테네 빈민가 무대
‘흑·백·황’ 청춘의 충돌·상처 보듬기
테오도루 24번지
손서은 지음/문학동네·1만1500원
글로벌 세상이라더니, 한국 소설의 무대 역시 글로벌해졌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니코스 아저씨 탓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낯선 무대에 대한 일말의 강렬한 호기심을 자아낸다. 갓 짠 올리브유를 실은 차를 배에 싣고 크레타 섬을 떠나려는 한국인 아버지와 아들. 이들이 가려는 곳은 어디?
그리스 본토의 중심, 아테네다. 정확히는 이 유서깊은 도시에서도 가난한 이민자와 토박이 빈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 ‘테오도루’로 설정됐다. ‘신의 선물’이란 뜻을 품은 이 동네 24번지가 5년 전 한국에서 이민온 부자, 16살짜리 중학 3학년생인 ‘민수’와 34살 난 ‘미혼부’ 아버지가 사는 공동주택이다.
한밤중 고장난 차 뒷좌석에서 이 부자가 맞닥뜨린 건 몰래 숨어든 16살짜리 ‘미혼부’ 아빠였다. 나이지리아에서 밀입국해 짝퉁 가방을 팔아 생계를 잇는 ‘요나’와 그의 여덟달 된 아기.
손서은의 청소년 장편소설 <테오도루 24번지>는 국가부도가 닥치기 직전의 그리스를 무대 삼아 한국인 이민 소년과 나이지리아의 밀입국 소년, 그리스 토박이 10대들의 만남과 충돌, 결국은 서로 건네게 되는 위로의 목소리를 담는다.
이 소설은 끊임없이 떠들어대며 골목길 시장통을 달리는 추격전, 혹은 달리기 한판 같다. 작중 화자인 ‘나’, 곧 ‘민수’의 동선을 따라가며 소설은 쉴틈없이 등장인물들을 쏟아낸다. 인상적인 첫 대면을 한 나이지리아산 동갑내기와 ‘나’의 서사가 중심이려니 예단하는 독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테오도루 거리에 접어든 나는 아래층 집 어머니 슬하에 사는 금발의 ‘실종소년’ 콘스탄티노스를 등장시키고, 이어 쉼없이 떠드는 그의 여동생 마르타, 고2 누나 드미트라의 설레발을 한껏 듣게 하더니, 이윽고 얼마 전 그 집에 스며들었다는 ‘그놈’을 등장시킨다. ‘그놈’의 이름은 레오니스. 조각 같은 얼굴을 한, 역시나 16살인 레오니스는 16년간 보육원 생활을 하다, 오래전 죽고 없는 아버지의 가족이라는 아래층 사람들을 찾아온 것.
단숨에 마지막 쪽에 이르고 나면, 제6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의 심사평 행간에 생략된 말을 알 것 같아진다. 우선 주인공인 ‘나’의 심연이 잘 잡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나’를 5년간 보육원에 맡겼다가 되찾은 뒤 이민을 왔다. 그가 나를 5년 동안이나 버렸다는 사실은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나의 불안감과 애증의 진원지로 설정돼 있다. 이런 상처를 간직한 ‘나’라는 청춘은 산전수전 겪고 거울 앞에 선 어른인 듯, 쉼없이 사고를 터뜨리는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 화자에 머무는 느낌이다. 학교 담임선생이 곤경에 빠뜨릴 깜냥인 듯 던진 한국 분단문제 질문에 되레 한방 먹이는 나의 모습은 드라마 주인공으론 멋질 테지만, 실은 작가의 목소리인지 열여섯 청춘의 목소리인지 헷갈린다.
소설은 낯선 장소의 신선함을 넘어 속도감 있게 읽힌다. 과거로의 나선형 회귀 없이 직선으로 흐르는 고작 열흘 안팎의 시간 속에 인물들 이야기를 짜넣는 힘이다. 작가의 그리스 체류 경험을 녹여 썼다는 <테오도루 24번지>는 핍진한 성장담이라기보다는 한 이야기꾼의 멋진 여행담 같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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