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과의 유대감 붕괴.. 우리가 겪는 문제의 근원"

황수현 입력 2016. 2. 29. 16:13 수정 2016. 3. 2.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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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윤대녕, 11년만에 장편 '피에로들의 집' 발표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 모순을 들춘 사건이다. 여기에 직접 연관되진 않았지만 사실상 가장 강력하게 그 자장 안으로 빨려 들어간 부류 중 하나가 작가들이다. 어떤 작가는 집회에 참석하고 어떤 작가는 사회를 성토하는 글을 쓰면서 한국문학에는 예기치 않았던 공백도, 수확도 생겼다. 소설가 윤대녕(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장편 ‘피에로들의 집’(문학동네)도 세월호 참사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캐나다에서 돌아온 지 한 달밖에 안 된 윤대녕을 26일 서울 경복궁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윤 작가는 “몸과 마음을 현실에 끼워 맞추느라 정신이 없다”며 웃었다. 계간 ‘문학동네’에 작품을 연재한 지 얼마 안 돼 참사 소식을 들은 그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고 원고를 펑크 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출판사에 양해를 구한 뒤 캐나다로 떠난 것이 지난해 1월이다. “죄책감이죠. 이 사건에 내가 엄연히 개입해 있다는 확신. 강의에 들어가서 애들 얼굴을 볼 수 없었어요.”

국내에서는 도저히 연재소설을 이어서 완성할 수 없었던 그는 캐나다에서 절반 이상의 원고를 완성해 11년만의 장편으로 냈다. 도시 난민을 주제로 한 소설로, 1970, 80년대 경제개발 시기에 자본을 끌어 모은 ‘마마’가 할머니가 돼 연립주택 ‘아몬드나무 하우스’를 짓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일종의 유사가족을 구성해 살아가는 내용이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면담해보면 해체된 가정이 생각보다 많은 데 깜짝 놀랍니다. 타인과의 유대가 붕괴된 게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도시 난민에 대해 쓰기 시작했어요.”

소설은 국어교사로 일하다가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여행작가가 된 윤정, 생부가 누군지 몰라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현주, 연인의 자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휴학생 윤태, 폭력가정에서 자라 말을 잃어버린 고등학생 정민, 그리고 실패한 극작가 명우의 사연이 하나씩 공개되며 엮여 나간다. 혈연이 아닌 상처로 묶인 공동체는 찰기 없는 밥알처럼 풀풀 날리다가도 어느덧 서로에게 어설픈 온기를 얹어주는 사이로 발전한다.

대학생 윤태가 30대 후반 명우에게 하는 말에선 작가의 문제의식이 꽤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기성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이 때로 무차별적으로 힘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그런 걸까요? 더군다나 기득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태도가 더 거칠어지죠. 그런 난폭한 방식으로 자기 보상을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 같은데도 말예요.”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는 명우는 그 순간 작가의 분신이다. 그는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필사적으로 상대를 팔꿈치로 밀어내며” 생존권 확보에 목을 매온 우리에 대해 말한다. “삶의 다른 가치들은 돌아볼 겨를 없이 여전히 생존만이 목표일 수밖에 없는 거지. 때문에 타인에 대해 본능적으로 적대적이고, 관용이라든가 선의는 개입할 여지가 없는 거야.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타인의 존재가 필요한데도 말이야.”

작가의 문제의식은 세월호 참사와 캐나다 거주 경험을 통해 더욱 또렷해진 듯 하다. 윤대녕은 “걱정 없는 듯 보이는 캐나다 사람들을 보며 오히려 괴로웠다”고 말한다. “수평적 관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권리를 대물림하는 그들의 모습이 타자에 대해 사유할 여유조차 없는 우리와 대비돼 연민이 들더군요. 타인이 ‘발생’하지 않으니 관계도, 삶도 발생할 수 없죠. 삶의 무게를 덜어주는 건 정치인들 몫인데 기득권 싸움에만 치중하니 그 피해는 온전히 서민들 차지 아니겠어요. 여기가 살기 좋다는 생각보다는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 내 몫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에선 여성과 남성에 대한 작가의 시선 차가 극명하다. 마마가 가부장이 아닌 가모장 사회를 연상케 하는 것 외에도, 여성은 배려 있고 유연한 존재로 그려지는 반면 남성은 연약하거나 폭력적인 이미지다. 작가는 “우리 사회 남성성에 반감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남성, 그 중에서도 저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남성성이 많은 문제의 근원인 것 같습니다. 제 나이 대 남성 중엔 기득권을 놓으면 자기 정체성이 상실 당하는 듯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아요.”

“타자를 감응하는 능력에 있어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날 수 밖에 없어요. 한편으론 이 타자 감응력을 일깨우는 게 지금 문학의 할 일 아닐까 해요. 문학이 환호를 받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지만 삶은 이야기를 통해 존속하게 마련이니 앞으로 계속 쓸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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