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산순례기 고루포기산~능경봉] '칼바람'은 없다
돌이켜보면, 요즘처럼 계절에 공격적인 적은 없었다. 어릴 적을 떠올려 보자면, 아무리 추워도 원망의 태도로 겨울을 대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식구들 굶지 않을 정도의 양식만 있으면 그만이었고, 긴 방학이 마냥 즐거운 아이들은 들판과 골목에서 뼈를 키웠다. 마당에 널려 있는 빨래에 고드름이 달리는 일은 예사였다. 그래도 빨래는 말랐다. 마치 동태가 황태로 변하듯이. 그렇게 우리의 겨울은 익어 갔다.
‘칼바람’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흔히 쓰인 적은 없었다. 적어도 나의 지난 날 기억 속에는 ‘칼바람’이라는 낱말이 없다. 사실 요즘도 일상적인 입말로 쓰이지는 않는다. 방송 전문 용어라 해도 좋을 만큼, 방송 뉴스 프로그램의 날씨 관련 기자 리포트에 ARS처럼 등장한다.
언제부터 칼바람이 국어사전에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되지는 않은 것 같다. 내가 가진 <조선어사전>(1946년 발행)에는 없다. 최초의 우리말 사전으로 평가받는 이 사전은 문세영(1895~1952) 선생이 편집한 것으로, 1938년에 초판이 나왔다.
삶 자체가 전쟁이 된 세상이라지만 겨울 추위마저 다툼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까. 먹성 보잘것없고 입성 남루한 시절에도 바람을 ‘칼’로 여기지는 않았다. 더욱이 제가 좋아서 가는 산에서, 그것도 히말라야에서도 통할 복장을 하고 추위와 ‘싸울’ 일은 아닌 것 같다. 자연 속에서의 ‘호연’ 운운하던 ‘호언’이 ‘허언’이 되지는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때 명주군에선 ‘골폭산’, 평창군에선 ‘고루포기산’ 내세워
고루포기산(1,238.3m)으로 오르는 백두대간 능선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큰바람을 만났다. 올 들어 첫 한파가 닥친 19일이었다. 고루포기산 서쪽 대관령면 횡계리의 기온은 영하 18℃, 대관령은 영하 21℃였다(그날 서울의 아침 기온은 영하 15℃였다).
겨울에 추운 건 예삿일인데 뉴스는 온통 날씨 얘기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도 따뜻한 겨울에 볼멘소리들을 해댔었다. 방한복 장사가 안 되고, 겨울 축제가 취소되는 등의 이유였다. 이번 한파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라는 분석도 이어졌다. 북극 지방에 띠처럼 형성된 제트 기류가 온난화 때문에 남쪽으로 처지면서 한파가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뜨거운 바람’이다. 지난여름 에어컨이 일으킨 ‘나비 효과’인 셈이다.
고루포기산은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대관령면의 경계에 솟은, 백두대간의 능선에 자리한 산이다. 이 산 남서쪽의 발왕산(용평스키장), 북쪽의 능경봉, 능경봉 동쪽의 제왕산에 비하자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산이나 다름없었다. 이 산이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어나면서부터다. 요즘도 고루포기산은 단독 산행 대상지가 아니다. 고루포기산에서 능경봉까지 혹은 그 역으로 하루 산행을 한다. 특히 겨울철에 눈꽃 산행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운이 따라 준다면 하루 종일 참나무가 만든 눈꽃 터널을 걸을 수 있다.
고루포기산은 이름에 얽힌 시비가 많은 산이다. 1961년 4월 22일 명주군(현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산으로 각각 고시되었는데, 명주군에는 ‘골폭산’, 평창군에는 ‘고루포기산’이라 했다. 물론 같은 산이다. 지명 유래도 같다. 이 산 동쪽(왕산면)에 ‘골폭’이라는 마을이 있어서 산 이름을 ‘골폭’이라 했다는 것이다. 평창군에서는 이 산 너머 왕산면에 ‘고루포기’라는 마을이 있어 ‘고루포기산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현존하지는 않는 그 마을의 정확한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 그 마을이 있었던 강릉시 왕산면에서 부르던 이름을 따르는 것이 형식 논리상 옳을 것 같다.
이 산의 이름이 ‘골폭’이어야 할 다른 이유는 일제 때 만든 지도의 표기에서 찾을 수 있다. 1915년 전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1:50000 지도에 5,000여 개의 산 이름을 거의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 산은 한자 표기 없이 가타카나로 ‘コルポキ山(고루포기산)’이라 표기돼 있다고 한다. 이는 ‘골폭’의 일본식 발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씨가 국토해양부에 ‘골폭산’이 옳은 이름이므로 그렇게 고쳐야 한다고 요청했고, 2010년 4월 7일 국토지리정보원은 박씨에게 ‘골폭산’으로 이름을 고치겠다는 메일을 보냈다. 2011년부터 인쇄될 지형도부터 수정된 이름을 쓰겠다고 했다(<월간 산> 2010년 6월호 기사 참조).
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온라인 지도 서비스에는 아직도 ‘고루포기산’으로 표기돼 있다. 현 등산로 안내 팻말이나 정상석에도 ‘고루포기산’으로 적혀 있다. 그래서 이 글은 부득이 현 표기를 따랐다. 그런데 고루포기산 정상석 옆 백두대간 지명 안내 팻말에는 간략한 지리 정보와 함께 ‘다복솔이 많아 고루포기라 칭해졌다고 하며, 이곳에는 고로쇠나무도 많다’고 지명 유래를 밝혀 놓았다. 혼란을 더한 꼴이다. 이 팻말을 세운 주체는 밝히지 않았다.
고루포기산에서 북동쪽으로 허리를 낮춘 능선 1km 지점에 전망대가 있다. 대관령에서 선자령, 황병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근골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대관령 고원 초지의 풍광은 풍력발전기가 더해져서 더욱 이채롭다. 2006년부터 상업 운전을 시작한 강원풍력발전㈜의 대관령풍력발전단지에는 2MW(메가와트) 풍력발전기 49기가 가동된다. 5만 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전기를 만들기에 최적의 풍속은 초속 15~25m라는데 지금은 바람개비가 돌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부는 바람이 초속 25m 이상인 모양이다.
휘청거릴 정도로 부는 바람도 누군가에겐 ‘따뜻한 바람’
고루포기산에서 능경봉(1,123m)까지는 해발 900m 정도로 길게 내려앉았다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형국이다. 물론 잔물결 같은 높낮이는 계속되지만 가풀막은 없다. 1,000m가 넘는 능선에서 자라는 나무치고는 키가 큰 참나무가 줄곧 길동무를 해 준다.
횡계는 물론 이곳 백두대간 능선 위에도 눈이 없다. 바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간혹 몸이 휘청거릴 정도다. 몇 년 만에 발라클라바까지 꺼내 썼지만 노출된 눈 주위가 동상에 걸리지 않을까 조금 걱정이 된다. 하지만 이 바람은 누군가의 밤을 밝히는 전기를 만든다. 이 바람 역시 ‘따뜻한 바람’이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바람은 묘한 쾌감을 안겨 준다. 내가 살아 있다는 강렬한 느낌. 순간적인 몽환 상태는 아슴한 기억 속으로 나를 데려 간다. 겨울 마당의 빨래 고드름도 이때 마주한 기억이다. 살갗에 닿는 차가움 이상으로 내 마음은 따뜻해진다.
능선이라 해도 바람이 자는 곳이 있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는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아득하다. 한참을 서서 아늑함 속으로 가라앉는다. 건너편 산마루 위로 비껴드는 햇살이 문득 시야에 가득하다. 눈앞의 참나무 우듬지에는 꽃처럼 햇살이 매달렸고, 건너 흘러내리는 산마루 위 참나무 숲 위에는 눈처럼 빛 더미가 쌓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산의 겨울 풍경이다. 이 풍경은 산길을 걸을 때가 아니어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먼 산 능선 위 참나무 숲으로 떨어지는 햇살을 보면 겨울잠을 자는 순한 산짐승의 솜털을 떠올린다. 겨울나무는 지구의 겨울 이불이다.
그 이불 속에는 북극 곰 털의 공기층 같은 물주머니가 봄이 올 날을, 아주 낮은 맥박으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얼음을 박을 듯한 찬바람이, 내 마음의 맥박을 나무의 맥박과 같은 빠르기로 뛰게 만든다.
능경봉을 앞 둔 지점에 제법 규모가 큰 둥근 돌탑이 서 있다. ‘행운의 돌탑’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객들의 성황이다. 그런데 상층부가 무너져 내렸다. 너무 많은 사람들의 소원에 짓눌린 모양이다. 오를수록 작아지고 가벼워지는 ‘돌탑의 미학’을 상기시키는 경책으로 삼는다.
능경봉에 서면 강릉 시가지와 경포호, 동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 지리지에는 능경봉을 ‘능정산(凌頂山)이라고도 한다’는 기록이 보인다. 능경봉은 능정산의 전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강릉을 굽어보는(陵景)’ 봉우리라는 뜻으로 새긴다. 사임당 신씨가 이 봉우리에 올랐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아마도 그가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의 모습은, 능경봉에서 본 강릉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능경봉에서 대관령까지는 30분 남짓 편안한 내리막이다. 대관령은 이제 고개로서의 쓸모를 거의 잃어 버렸다. 터널이 뚫리면서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관문으로서의 기능은 옛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길은 오로지 걸어서만 오를 수 있었던 과거의 정취를 되살려 준다.
큰바람이 지나는 길에서 하루를 살았다. 그곳에 ‘칼바람’은 없었다. 오로지 나의 체온만으로 충만한 하루였다. 오랜만에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았다. 겨울바람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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