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프집이 공부방? 뻔뻔한 토익학원

신은별 2016. 2. 22.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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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특수로 교실 부족해지자

인근 술집·노래방과 계약 맺고

오전 시간대 스터디룸으로 제공

과장 광고 등 지나친 상술 도마에

일부 어학원들이 강의 전후 학생들이 이용할 스터디 공간으로 술집, 카페 등을 제공하면서 평일인 지난 11일 오후 2시 서울 강남역 인근 한 술집이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모여든 수강생들로 가득 차 있다.

영어 토익 성적을 고민하던 대학생 권모(21)씨는 얼마 전 고심 끝에 서울 강남의 A어학원 수강을 결심했다. 학원 측이 내건 ‘강의 전후 스터디 공간 제공’ 조건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하지만 수강 신청을 마치자마자 학원 관계자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공부방은 다름아닌 인근의 한 호프집. 술과 음식 냄새 가득한 7개의 룸에는 수강생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권씨는 21일 “학원에 항의해도 ‘다들 이렇게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며 “점수를 올리려면 스터디는 필수라는 얘기를 들어 참고 공부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유명 어학원들의 도 넘은 상술이 도마에 올랐다. 방학과 취업 시즌을 맞아 학습공간 제공을 미끼로 수강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술집이나 노래방 등 공부방으로 부적합한 장소를 대여해 불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같은 학원들의 과장광고 행태는 위법 소지도 크다는 지적이다.

보통 오전과 오후 이른 시간대 이뤄지는 술집 스터디는 수강생 4~6명이 한 조를 이뤄 2시간 가량 공부를 하는 식이다. 방마다 학습을 관리하는 조교도 배치돼 있다. 하지만 학습 환경은 열악하기만 하다. 지난달부터 서울 강남역 한복판에 있는 술집에서 토익 스터디를 하는 대학생 정모(22)씨는 스터디 룸에 들어설 때마다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방을 둘러싼 벽에는 온통 ‘합방 오케이’ 등 부킹을 권유하는 듯한 문구와 취객들이 써 놓고 간 선정적인 낙서가 가득했다. 정씨는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술집 내부 조명이 워낙 어두워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며 “부모님에게는 차마 이런 곳에서 공부한다는 말씀을 못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어학원들이 술집까지 빌려가며 무리수를 두는 배경에는 ‘방학 특수’를 노린 학원 간 과잉경쟁이 자리하고 있다. 방학 중에는 학기보다 많게는 수강생이 3배 이상 몰려 다른 학원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 유치가 가능한데, 학원에 구비된 공간으로는 대규모 인원을 감당하기 어려운 탓이다. 아예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인근 술집들과 사용 계약을 맺고 공부방을 제공하고 있는 B어학원 관계자는 “방학에는 15개의 스터디 룸과 빈 강의실을 전부 돌려도 수강생의 70% 정도 밖에 수용하지 못해 대체 공간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술집들도 딱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여서 학원 측 제안에 적극 응하고 있다. 서울 종로의 C호프집은 인근 대형 어학원에 평일 3시간을 대여해 주는 조건으로 시간당 2만원을 받고 있다. C호프집 관계자는 “손님이 없는 낮 시간을 놀리느니 장소만 빌려 주고 매달 120만원 부수입을 올릴 수 있는 셈”이라며 “목 좋은 곳에 있는 술집이나 노래방은 대여를 거절해도 학원 측이 웃돈을 줘가며 계약에 매달리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어학원들의 술집 대여가 명백한 법규정 위반은 아니지만 과장 광고에 해당하는 만큼 제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안락한 독립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약속과 달리 등록 마감 후 술집을 내주는 것은 일종의 속임수”라며 “방학 중 수요 급증이 충분히 예상되는 점을 감안해 외부 스터디 장소를 사전에 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평생교육과 관계자도 “10인 이상을 상대로 30일 이상 교습 행위를 할 경우 학원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경고했다.

글·사진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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