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채상우의 대중문화 산책] 엑스(X) 같은 사랑
[아시아경제] 사랑이 ‘X 같다’고? 도대체 이건 무슨 말인가? 아니 아무리 대중가요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직설적으로 말해도 되는 걸까? 도대체 공중파에 나올 수나 있을까? 'X 같은 사랑', 신인 트로트 가수 태화(26)의 데뷔곡명이다. 가수의 나이나 노래 제목만 들었을 때에는 그저 고만고만한 세미트로트나 네오트로트 혹은 당연히 후크송이겠거니 싶었다.
사실 신인 트로트 가수를 두고 이런 선입견부터 가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현재 한국의 주류 대중음악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아예 대놓고 스스로 상품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대중음악 또한 분명 예술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외설스럽고 천박하기 짝이 없는 행태다.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과 대중에게 단지 상품으로 팔리길 욕망한다는 것은 명백히 그 차원이 다르다. 물론 대중음악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상품의 형식으로 등록되어야 유통이 가능하다. 즉 상품으로 팔려야만 대중이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은 그럴싸하게 잘 포장된 상품보다는 자신이 사랑할 음악을 기다리고 있다. 대중음악은 이제 상품이라는 소비 형식을 뛰어넘어 어떤 본래적인 음악적 가치를 다시 기억해 내고 창조해야 한다.
태화의 'X 같은 사랑', '온나온나', '남가좌동 그 사람'이 반가운 것은 우선 이 때문이다. 이 노래들은 요즘 유행하는 세미트로트나 네오트로트가 아니다. 세미트로트나 네오트로트는 대중이 소비하기에 최적화된 트로트다. 애교 섞인 목소리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한 세미트로트나 아이돌 스타들을 동원해 급조한 네오트로트는 한국 트로트계에 심폐소생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한 그만큼 이 장르(?)들은 트로트를 그저 가볍디가벼운 가사에 아무런 흥취도 의미도 없이 다만 잠시 흥얼거리다 말 노래 쪼가리로 전락시킨 책임도 있다. 트로트는 결코 그런 음악이 아니다.
한국 트로트계의 거성 나훈아는 트로트를 일러 “슬플 때는 슬픔이 되고 기쁠 때는 기쁨이 되는, 우리의 아리랑”이라 말한 바 있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노래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상징한다. 모름지기 ‘아리랑’이라 칭할 수 있으려면 우선 누구나 부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노래에는 ‘우리의’ 정한이 담겨 있어야 한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경탄과 탄식, 희망과 좌절, 행복과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고 서로 나눌 수 있는 공통감각과 사연이 내재되어 있어야 ‘아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아리랑’은 그 노래를 향수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생을 투영한 가사를 개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트로트가 ‘아리랑’이라면 정말 그래야 한다.
태화의 'X 같은 사랑'은 바로 그런 노래다. 연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누군가는 그 사랑을 두고 당장은 ‘X 같다’고 말하리라. 더구나 사랑한 대상이 결국 자신을 배신한 위선자에 지나지 않았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오래전 이별한 사람이 문득 새삼 떠오를 때, 그리고 그 사랑을 두고 딱히 무엇이라 지칭할 수 없을 때 사랑은 평생을 두고도 알 수 없는 미지수 ‘X’와도 같은 것이다.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져야만 하는 경우나 사별한 이에게 사랑은 그것 자체가 원망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원망 속에는 도무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애와 생의 진정한 비의에 대한 경건한 수용이 함께한다. 이처럼 ‘사랑’은 사람의 얼굴 생김새가 하나하나 다르듯 누구에게나 그 사연과 정감과 진폭이 다르다. 그러니 사랑은 ‘X’다. 이러한 정의는 불성실하거나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그 단독성과 결곡함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하는 바다. 'X 같은 사랑'의 저 마지막 구절 “다시는 오지 마라 이 엑스 같은 사랑아”는 그러니까 단지 원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그를 넘어선 사랑에 대한 적극적이고 절대적인 수용이다. 역설적이게도 한 사람의 생을 휘감았던 ‘사랑’은 반드시 다시 오게 마련이고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다시 사랑에 다시 빠져든다. 'X 같은 사랑'의 가사는 이처럼 겹겹으로 이루어진, 쉽게 해명하기 어려운, 두터운 사랑의 본모습을 날것 그대로 보여 준다.
태화의 'X 같은 사랑'과 '온나온나', '남가좌동 그 사람'을 작사한 분은 한국 트로트계의 거목이신 조동산 선생이다. 조동산 선생은 '차표 한 장'(송대관), '미스 고'(이태호), '성은 김이요'(문희옥), '몇 미터 앞에 두고'(김상배), '미스터 유'(김지애), '내 영혼의 히로인'(남진), '행운'(나훈아), '너는 내 남자'(한혜진) 등을 작사, 작곡하였으며, 제4회 반야월 가요 작사상 대상, 제4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작사상, 제9회 한국최고인기연예대상 작사상, 2010 대한민국향토가요제 작가 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한마디로 조동산 선생은 그 분 자체가 한국의 트로트다.
태화의 데뷔까지의 과정을 다룬 음악다큐 '내 인생의 히트를 위하여'(아이넷TV, 2015년 11월 30일 방영)에 따르면 태화는 조동산 선생이 마음을 다해 키운 마지막 제자다. 조동산 선생의 말 그대로 트로트는 “우리의 삶과 가장 밀착된 음악 장르”다. 그렇기에 “인생의 질곡이나 굴곡에서 비롯된 애환”을 이해할 수 있어야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조동산 선생이 신인 가수 태화를 자신의 마지막 제자로 거둔 까닭은 “트로트가 가야 할 기본적인 길”에서 그치지 않고 그 궁극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조동산 선생은 대쪽 같은 분으로 유명하다. 그런 조동산 선생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앳된 제자를 이처럼 상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그녀의 목소리와 표현력에 있다. 김수환 작곡가는 “50년 가요 생활을 하면서 ‘아, 이런 가수는 처음이구나’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라고 말할 정도다.
트로트가 ‘아리랑’이라면 ‘아리랑’을 부를 수 있는 목소리와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태화의 목소리는 여느 트로트 신인들의 그것과 분명히 다르다. 다만 흥겹거나 다만 간드러지거나 다만 흐느끼는, 즉 애써 만들어 낸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성공한 선배 가수들의 창법을 교묘하게 따라하거나 뒤섞은 것도 아니다. 또한 근래 세미트로트나 네오트로트를 부르는 어떤 가수들처럼 리듬과 편곡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야구로 치자면 직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트로트 가수로서 지녀야 할 가장 정직한 목소리다. 아니 정직하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하자면, 트로트 가수로서 갖추어야 할 진정성 어린 목소리다. 사랑에 대한 그리고 생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껴안고 함께하고 위로하고자 하는 트로트 가수로서의 자세가 그 진정성을 아래에서 든든히 지지하고 있다. 신인 가수 태화는 자신이 노래를 잘하는 가수임을 뽐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당연한 말이다. 가수라면 노래는 누구나 잘해야 한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처럼 “가사를 제대로 전달하는” 그래서 “심금을 울리는” 가수는 흔치 않다. 신인 트로트 가수 태화는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스스로 비워 낸 바로 그 자리에 대중은 자신의 사연들을 한 움큼씩 채워 넣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스 신화의 뮤즈들 가운데 칼리오페는 천상의 목소리를 지녔다고 전해진다. 칼리오페는 호메로스에게 '일리아드'와 '오딧세이'의 영감을 준 서사시의 여신이며, 아프로디테와 페르세포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한 지혜의 여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즉 천상의 목소리는 단지 그 음색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 속에 생에 대한 통찰력과 지혜가 깃들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아직은 신인이지만 태화를 일러 한국 트로트계의 칼라오페라고 칭하고자 하는 까닭은 그녀의 목소리가 단지 아름답기 때문만이 아니라 트로트에 대한 그녀의 앳되지만 당찬 열정과 스스로를 비워 내 대중의 그 수많은 사연과 기쁨과 슬픔과 고통과 정한을 함께하고자 하는 가수로서의 자세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채상우는…
2003년 계간 『시작』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멜랑 콜리』(천년의시작, 2007)와 『리튬』(천년의시작, 2013)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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