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상납'.. 미생들 씁쓸한 밸런타인데이

신지후 2016. 2. 15.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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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2년 차 직장인 김모(24ㆍ여)씨는 11일 상사와 동료 16명을 위한 초콜릿을 만들다 밤을 꼴딱 샜다. 지난해 밸런타인데이 때 여자동기들 중 자신만 초콜릿을 선물하지 않아 겪은 아찔한 경험 때문에 올해는 일찌감치 준비에 나선 것이다. 김씨는 14일 “남자친구와는 밸런타인데이를 챙기지 않기로 합의했으나 직장 상사와 동료 몫은 어쩔 수 없다”며 “특히 ‘후배들한테 사랑 받는다’고 과시하는 부서장의 눈치를 보느라 경쟁 기류가 조성돼 수제 초콜릿 제작에 도전했다”고 털어놨다.

정규직 전환을 목표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최모(25ㆍ여)씨도 점장과 동료 8명에게 1만원 내외의 벨기에산 초콜릿을 줬다. 각각 3,000원 내외의 선물도 곁들였다. 최씨는 “초콜릿 한 세트만 해도 시급을 훌쩍 뛰어 넘지만 순탄한 회사 생활을 위해선 관계 관리가 필수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연인 간에 사랑의 징표를 주고받는 밸런타인데이가 사회 초년생인 ‘미생’들에겐 씁쓸한 기념일이 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회사 동료들을 의무적으로 챙겨야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선물 준비에 공을 들여야 하는 탓이다. 실제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12일 직장인 및 아르바이트생 913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회사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겠다”고 응답한 직장인과 알바생이 각각 46.5%, 33.0%에 달했다.

백화점과 상점가에는 이런 신입 직장인들을 겨냥한 일명 ‘의리 초콜릿’ 세트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밸런타인데이를 하루 앞둔 13일 서울 중구의 한 대형 백화점에는 ‘예쁘게 봐주세요’, ‘드시고 힘내세요’ 등 문구가 붙은 의리 초콜릿 세트(11개입)가 4만5,000원에 판매 중이었다. 마포구 지하철 홍대입구역 인근 노상과 문구점에서는 인형과 향수를 비롯한 각종 선물이 든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세트가 7만~8만 원대에 팔리기도 했다.

수제 초콜릿 재료가 즐비한 서울 방산시장도 비용을 아끼고 조금이라도 정성을 부각하려는 직장인들로 대목을 맞았다. 김진서(27ㆍ여)씨는 “초콜릿 재료부터 포장지, 쇼핑백, 카드까지 사면 사실상 공산품을 구매할 때와 가격은 비슷하지만 마음을 보다 잘 전달할까 싶어 기꺼이 발품을 팔았다”고 했다.

일부 기업에서는 초콜릿 ‘공구(공동구매)족’과 ‘해외 직구(직접구매)족’까지 생겨났다. 대기업 입사 3년 차 여성 정모(28)씨는 “부서 여사원 6명이 7,000원씩 모아 동료 40여명의 초콜릿을 준비했다”며 “선물 격차가 나 괜히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지 않아도 되고 비용도 줄이려 머리를 맞댔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 출장에서 돌아 온 남성 이모(34)씨는 일본산 고가 초콜릿을 두 손 가득 들고 귀국했다. 이씨는 “우리나라와 해외의 초콜릿 가격 차가 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 부탁으로 대량 구매를 했다”고 설명했다. 12일 한국소비자원의 통계조사 결과를 보면 수입 초콜릿을 해외 직구로 살 때가 국내 구입보다 최대 43% 저렴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뜩이나 연인간 ‘상업주의’를 부추긴다는 지탄을 받고 있는 밸런타인데이가 직장 초년생들을 겨냥한 마케팅으로 불똥이 튀면서 기념일의 순수성을 더욱 퇴색시켰다는 비판이 비등하다. 전상길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는 “수평적 위계질서가 자리잡은 기업환경에서는 기념일 자체가 가족적 유대감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한국에서는 보이지 않는 강압으로 비쳐질 수 있다”며 “기념일에 민감한 신입사원이 늘수록 기업의 소통문화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신지후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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