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중고 학생들이 써드린 평범한 할아버지·할머니 자서전 감동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일곱 살에 두 눈이 먼 백기순(전북 부안·70) 할머니. 앞을 보는 게 가장 큰 소원이었던 할머니의 삶은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 외롭게 말년을 보내던 할머니에게 지난해 가을 손주와 마을 중학생들이 찾아왔다. 할머니의 삶을 자서전으로 써드리겠다며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다. ‘부끄럽기만 한 인생’이라며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는 아이들의 설득에 결국 한 많은 인생을 풀어놓았고 얼마 전 작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았다. 성공한 사람이나 가지는 줄 알았던 자서전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할머니의 자서전은 전북도교육청이 지난해 9월부터 추진한 ‘아이들이 써드리는 어르신 자서전’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도내 초·중·고교생들이 2∼3개월간 주위의 평범한 70∼80대 노인들을 만나 인생 이야기를 채록한 뒤 책으로 묶어냈다. 참여한 학생은 장유라(전주 완산중)양 등 30개 학교에서 400여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52명의 학생이 어르신 28명의 얘기를 받아 적은 책 15권이 1차로 세상에 나왔다. 각 표지엔 ‘응답하라 나의 청춘’ ‘혼자 걷는 해변’ ‘산너머 산이랑께’ 등의 제목이 달렸다. 김제 치문초등학교 김민재군 등 3학년 7명은 손계은 할머니의 인생을 ‘The letter from grandmother(할머니에게서 온 편지)’라는 제목의 그림책으로 엮었다.
책은 분량이 수십쪽에 불과하고 형식도 제각각이다. 하지만 주인공들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 됐다. 하찮게 생각했던 자신의 삶이 충분히 가치 있으며 후손에게 교훈이 될 수도 있다는 자부심을 줬기 때문이다. 몇 분의 사연은 “부끄러워 도저히 안 되겠다”는 얘기에 끝내 묻히게 됐지만 조만간 20여권이 추가로 출간될 예정이다.
이번 작업은 아이들에게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다줬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게 된 것이다.
친할아버지를 인터뷰한 부안 백산중 1학년 이아론양은 “제주에 사시는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1주일간 제주에 다녀왔다. 처음으로 긴 얘기를 나누며 할아버지가 젊을 적 대단하셨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며 “내 이름이 인쇄된 책도 만들게 돼 참 기쁘다”고 말했다.
전주 지역 한 지도교사는 “‘문제아’로 꼽혔던 학생이 이번 과정을 통해 진득하고 모범적인 아이로 변해갔다”고 귀띔했다.
전북도교육청은 이 같은 과정과 성과를 모아 15일 도교육청에서 출판기념회를 연다. 초대장에는 이런 내용이 적혔다. “(학생들이) 어르신 삶을 이렇게 역사로 만들었습니다. 한 글자의 언어가 강물처럼 흐릅니다. 자서전은 우주만 합니다. 아이들도 커졌습니다.”
도교육청은 앞으로 이 사업을 확대하는 한편 일부 책을 다듬어 출판시장에 내놓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사업을 기획한 최병흔 전북교육청 장학사는 “아이들이 처음에는 자서전을 써드린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스스로 많이 배웠다는 말을 많이 한다”며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좋은 공부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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