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킹'이 아니라 '대시'라구요?..'구애' 탈을 쓴 강력범죄

이랑 2016. 2. 1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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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양금석(55·여)씨는 최모(62)씨로부터 지난 해 8월 한달 동안 메시지 74통과 음성메시지 10통을 받았다. "하나님이 당신을 나를 돕는 천사로 지목했다", "사랑한다", "전화를 받아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최 씨는 스토킹(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최근 구속됐다.

할리우드 배우 기네스 펠트로,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팝가수 리한나, 배우 조인성. 이들도 팬이나 혹은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지독한 스토킹를 당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스타들 모두 겉은 호감과 애정으로 포장된, 그러나 실제로는 협박과 주택 침입 등의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현실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전화나 문자를 보내는 것은 기본이고 협박하고 납치하고 때리고 심지어 살해까지 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이 한국에서 유독 더 쉽게 일어날 수도 있다면 어떨까?

지난 해 7월 대구 서구 평리동의 주택가 골목길에서 주부 A(48)씨가 출근하던 길에 스토커의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13년에는 유모(남, 당시 22세) 씨가 고교 재학시절부터 짝사랑 하던 상담교사 B씨(여·사망 당시 34세)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지난 해 크리스마스 때는 한 40대 남성이 사귀던 여성이 이별을 통보한 데 앙심을 품고 독성화학물질을 뿌려 각막과 어깨에 화상을 입힌 사건이 벌어졌다.

스토킹이 단순히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하는 수준을 넘어서 강력범죄로 이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반대로 스토킹을 견디다 못 해 범행을 저지른 경우도 있다. 지난달 경남 김해에서는 40대 남성에게 스토킹을 당하던 C(여, 당시 22세)씨가 스토킹 남성을 집 안으로 유인해 의자에 묶어놓은 채 흉기로 살해헸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2011년부터 3년간의 상담일지를 분석해 발표한 내용을 보면 일반인들도 스타들 못지 않은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피해자들은 여성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는데 (전체 97.5%) 10명 가운데 9명꼴로 '아는 사람'에게 스토킹을 당했다. 스타들이 얼굴도 잘 모르는 팬 등에게 스토킹을 당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주목할 점은 스토킹을 하는 '아는 사람'의 56.7%는 현재 데이트를 하고 있거나 이전에 데이트를 했던 전 또는 현 '애인'이었다. 또 현재나 이전의 배우자가 2.1%였다. 한 마디로 지금 사랑하고 있거나, 한때는 사랑했었던 사람들이 스토킹 가해자의 대다수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스토킹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따라다니거나 전화나 문자로 끈질기게 괴롭히는 것" 정도가 아니라 앞서 나온 사례들처럼 강력범죄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등의 자료를 보면 성폭력 중복 피해를 입었던 스토킹 피해자들이 무려 33.8%나 됐고 집에 불시에 침입하는 등의 행위가 24.5%, 직접적인 상해나 감금, 납치, 살인 미수 등의 피해도 11.9%나 차지했다. '로맨스'가 '호러'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호러'는 대다수가 상대방을 거절할 때 시작됐다. 내 호감을 처음부터 받아들여 주지 않을 때, 사귀다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스토커들의 '구애'는 더 강력한 범죄의 씨앗이 됐다.

☞ [바로가기]한국성폭력상담소 2015년 상담통계현황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이 바로 이 지점에 있다. 호감이나 구애로 시작됐지만 강력범죄로까지 악화되는 양상. 누군가는 '구애'라고 생각하며 쫓아다니지만 상대방은 공포와 혐오라고 느낄 수 있는 행동들, 스토킹에 대한 태도에 대한 남녀 차는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다양성관리연구소의 김정인 소장이 2015년 남녀 대학생 388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녀가 과거에 연인관계였다면 한쪽이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여자들은 누군가 자신을 쫓아다니면 우쭐해진다", "이성에 반하여 쫓아다니는 사람을 스토커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 등의 질문에 남자들은 "그렇다"고 답한 사람들이 여자보다 많았다. 여자들은 "그렇다"라고 답한 수가 평균보다 낮았다. 남성들은 스토킹을 이성관계 안에서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고 적극적인 애정 공세로 생각하는 통념 정도가 여성보다 높은 것이다.

삼육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서경현 교수의 지도를 받아 대학생 1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간단한 설문조사에서도 '스토킹'에 대한 인식차이가 드러났다. 어떤 행위를 스토킹을 보고 있는지 대해서 질문했는데 스토킹의 전형으로 알려진 '지속적으로 따라다니기', '전화나 문자를 계속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남녀 모두 명확히 스토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거절 의사를 밝혔는데도 좋아할 만한 선물을 지속적으로 보내는 행동', 'SNS상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무조건 찬성하는 글을 남기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남자들은 여자들과 비교하면 '스토킹'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었다. 스토킹이라기보다는 '구애 행동'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남녀의 인식차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등의 한국적 정서와 통념과 결합하면서 스토킹은 범죄가 아니라 적극적인 '대시'로, 여자가 싫다고 하는 경우는 '튕기는 것' 쯤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한국적인 인식이 스토킹을 용인하고, 스토킹 행위가 계속되도록 만드는 상당한 이유가 된다. 외국의 기준으로 봤을 때 스토킹에 해당하는 행위를 당하는 여성이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이성 관계에 놓여있는 사람 중에 거의 한 60~70%에 이른다는 연구가 있을 정도로 한국 남성들이 외국에서는 처벌의 대상이 될 만한 스토킹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스토킹이 과감한 '구애'로 치부되고, 여성의 싫다는 표현은 '밀당' 정도로 여겨지는 분위기 속에서 스토킹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마저 미비하다는 점이다. 현재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지속적으로 접근을 시도해 면회 또는 교제를 요구하거나 지켜보기, 따라다니기 등의 행위를 반복하는 사람"은 2013년 시행된 경범죄처벌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

하지만 스토킹 범칙금은 8만원이 고작이다. 암표 매매를 하다 적발되면 내야하는 16만 원보다 적다. 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직접 문자나 전화기록을 수집하고 상대방에게 명시적으로 거절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 등 스스로 스토킹 피해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수사기관에 신고를 하는 사람들은 10명 가운데 2명 꼴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무반응으로 대응한다. 이러다보니 '따라다니기' 수준의 스토킹만으로는 처벌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스토킹이 결국 폭행, 감금, 살인 등의 형법상 범죄로 변질돼서야 처벌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 사이 누군가는 맞고, 감금당하고, 심지어 살해되고 있다.

해외 여러 나라에서는 일찌감치 스토킹이 공포와 위협을 일으키는 범죄라는 점을 확실히 했다.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는 스토킹 처벌법이 있는 것을 물론이고 기본적으로 스토킹 여부를 구분할 수 있는 일종의 체크리스트를 활용하고 있다. 스토킹이 무엇인지 명확히 명기하고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고 양형도 정해놓았다.

우리는 어떨까? 18년 동안 8건의 '스토킹'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없다. 다행인 것은 지난달 발생한 김해 스토커 살해 사건으로 정부가 스토킹 가해자에 대해 최대 징역 2년, 2천만 원 벌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내놓으면서 스토킹 관련 법안에 대한 논의도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점이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연인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살해당한 사람은 사흘에 한 명 꼴이었다. 살인까지 가기 전에 상당수가 스토킹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어디서부터를 '스토킹'으로 볼 것인지, 피해자 범위는 어디까지로 해야할지, 그에 따른 적절한 제재는 무엇인지, 우리에게는 시급히 논의해야할 과제가 쌓여있다.

오늘밤(14일) 11시 20분 KBS1TV 취재파일K에는 <구애의 가면을 쓴 범죄, 스토킹>이 방영된다.

이랑기자 (herb@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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