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캠퍼스 'OT 공포증'

입력 2016. 2. 1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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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때기 물린뒤 술 퍼붓고.. 장기자랑 해봐라"
[동아일보]
‘깔때기로 입에 술을 붓는다고?’

서울의 한 사립대에 합격한 새내기 이모 씨(18·여)는 최근 학교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익명의 글을 보고 기겁했다. 모 학과의 ‘새터’(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줄임말·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페트병 윗부분을 자른 뒤 입구를 신입생의 입에 물리고 소주와 물을 섞어 붓는 전통이 있다는 글이었다. ‘고통스러워 뿜어내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나도 처음 할 때 말도 못할 압박감에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생생하다’는 글이 이어졌다.

해당 글은 교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과(科)일까 봐 무섭다’ ‘자칫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 등 우려하는 댓글이 쏟아졌다. 일부 학생은 ‘술을 거의 섞지 않고 물만 준다’ ‘이것도 하나의 추억’이라고 반박했지만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한 학생은 ‘우리 과에는 냉장고 채소 칸에 술과 음료를 섞어 부은 뒤 돌아가며 마시는 전통이 있다’는 ‘추가 제보’를 올리기도 했다. 결국 해당 학과는 올해부터 일명 ‘깔때기’를 폐지하기로 했다. 이 학과 부학생회장은 “새터는 신입생들이 대학에 발 디딘 것을 축하해주는 행사이기 때문에 공포감을 제거한 순수한 추억만을 선물해주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설 연휴가 지난 뒤 각 대학에서는 본격적인 새터 행사가 열린다. 음주로 인한 실신, 성희롱, 심지어 사망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반복되는 사건 사고 때문에 최근에는 참석자들에게 술을 강권하지 않는 문화가 조금씩 퍼지고 있다. 학교별로 자정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일부 대학에는 ‘무(無)알코올 새터’도 등장했다. 신입생들이 원하지 않으면 술 대신 음료수를 주는 학교도 있다. 술을 마시지 않는 학생들을 위한 방을 따로 마련하는 경우도 있다. 고려대 문과대학은 ‘아니라면 아닌 거지’라는 제목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새터에서 지양해야 할 것들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하지만 신입생들에게 새터는 여전히 공포의 장이다. 뿌리 깊은 음주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술 없는 새터를 만들어 보자는 움직임에 선배들은 “그러면 밤새 머리 맞대고 토론이나 하다 자라는 것이냐”며 불만을 나타낸다. 2학년이 되는 최모 씨(20)는 “지난해 새터를 마친 뒤에는 동기들이 ‘우리 내년에는 억지로 술 먹이지 말자’고 하더니 막상 후배들을 맞게 되자 ‘우리도 마셨으니 신입생들도 마셔야 한다’는 식으로 바뀌어 답답하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내기들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한 신입생은 “아무리 강요하지 않는다 해도 막상 술을 안 마시면 분위기를 해칠 것 같다”고 걱정했다. 또 다른 신입생 한모 씨(20·여)는 “몸이 안 좋아 술을 못 마시는데 처음 보는 선배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대학 사회 내부에선 신입생들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술 없이도 어색한 사이를 극복할 수 있는 ‘관계의 기술’이 필요하다는 자성도 나온다. 하종은 카프성모병원 알코올치료센터장은 “뇌를 마비시키는 술의 강력하고 인위적인 기능에 길들면 건강한 의사소통 문화를 만들 수 없다”며 “술을 마시지 않고도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술 외에 새터에서 ‘장기자랑’을 강요하는 것 역시 신입생들에겐 큰 고민거리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대 문과대가 2016년도 신입생 173명을 대상으로 ‘새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에 대해 물은 결과 술에 이어 장기자랑이 2위에 올랐다.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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