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언론들만 편애하는 그 단어, '유커(遊客)'

이상엽 기자 입력 2016. 2. 9. 10:15 수정 2016. 2. 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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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을 전후해 처음으로 '유커(遊客)'라는 말이 일부 신문에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여행객'이란 뜻이지만, 국내 한정으로 '중국인 관광객'을 뜻하는 이 말은 지난해부터 사용 빈도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말을 사용하는 곳은 거의 대부분 언론입니다.  일반 국민들은 아직 일상생활에서 '유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길 가다 보고는 "어, 저기 유커들이다!"라고 하지 않지요. 우리네 일상 대화에서는 그저 '중국 관광객'일 뿐입니다.

네이버 검색창에서 '유커'라고 치면 가장 먼저 뜨는 자동 검색어가 '유커 뜻'일 정도로 아직 대중들에게는 생소한 말입니다.  하지만 매일 같이 방송과 신문에서는 '유커' '유커'하고 있으니 어색한 부분도 있습니다. 낯선 외국어에 대한 거부감입니다. 그럼에도 언론들이 '유커'라는 중국어를 쓰는 건 도대체 무슨 까닭일까요?

'유커'라는 말이 쓰이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시장의 특수성에 있습니다. 한때 일본인 관광객이 가장 '큰 손'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던 한국 관광업계에서 오늘날 가장 '큰 손'은 단연 중국인들입니다. 음력 설(춘절) 연휴를 맞아 수만 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하거나 제주도를 찾습니다.

면세점과  백화점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립니다. 매년 빠르게 성장하는 이들의 구매력만 바라보고 있는 한국 업계로서는 중국인들이 그만큼 돋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도 언론의 '유커' 사용빈도는 이들의 증가세 내지는 소비금액과 대체로 비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는 다른 나라 관광객들에게도 그런 호칭을 붙여서 불렀던가요? 예컨대 영미권 관광객은 '투어리스트(tourist)', 프랑스어권 관광객은 '투히스트', 일본인 관광객은 '츠리스토(ツ-リスト)' 내지 '칸코갸쿠(觀光客)'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중국인 관광객을 굳이 '유커'라고 부른다면 얼마든지 같은 논리로 그렇게 부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어제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한 투히스트는 3백 명, 투어리스트는 6백 명, 유커는 2천 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같은 식의 언론 보도가 나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건 억지입니다. 지나친 외국어의 남용입니다. 애초에 국적별로 '관광객'의 명칭을 다르게 붙이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고 또 용납된다면, 우리 정부가 '중국의 유관 언론 각방'에 공문을 보내 앞으로 한국인 관광객을 부를 때 한글 표기 그대로 '관광객(Gwangwanggaek)'이라고 표기해 줄 것을 권고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표의문자인 한자를 쓰는 중국에서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다른 나라보다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 60~80년대 한국 관광업계에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차지하던 비중은 오늘날 중국인 관광객들의 그것과 비교할 때 더하면 더했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당시엔 하루가 멀다하고 '일본인 기생관광 추태' 같은 기사가 나오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언론이 '츠리스토'나 '칸코갸쿠'라는 말을 기사에 쓰지는 못했습니다.

'유커'라는 표현은 지양돼야 합니다. 언중(言衆)이 쓰지 않는 외국어를 억지로 언론이 주입시키려는 모양새가 몇 년 동안 이어지고 있지만, 이런 말을 쓴다고 중국인 관광객에 대한 대접이 더 올라가거나 관광수입이 늘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만약 중국에 놀러 갔을 때 현지에서 <韓國人 관광객 歡迎光臨> 같은 표지판을 보면 과연 반가운 느낌이 들겠습니까? 쓰는 사람도, 보거나 듣는 사람도 어색할 뿐입니다. '유커'라는 말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음력 설에 해당하는 춘절(春節)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자꾸 '춘제'라고 부르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것이 봄 축제, '춘제(春祭)'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그저 간단하게 '음력 설' 내지는 '설날'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불필요한 외국어를 갖다 붙입니다.

 기왕 중국어 명칭을 그대로 쓰기로 했으면 추석에 해당하는 '중추절(中秋節)'도 '중치우제'라 써야 그나마 일관성이라도 있을텐데, 이것만은 도저히 어색해서 안 되겠는지 그냥 '중추절'입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이상엽 기자science@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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