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은 도둑처럼 찾아온다

조영주 입력 2016. 2. 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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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2%대 성장률, 0%대 물가상승률에 벌써 익숙해진 것일까. 민간경제연구기관과 투자은행(IB)들은 지난해 말부터 올해 경제성장률이 3%에 미치지 못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경제정책 당국자들도 사석에서 3% 달성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자주 내뱉는다.

정부는 올해 1.5% 안팎의 소비자물가를 예상했지만 이런 전망이 불투명해졌다는 지적이 연초부터 쏟아지고 있다.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도 0.8%에 그쳤다. 올해 유가가 다소 오를 것이라는 전망이 빗나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초저유가는 세계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악재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의 어려움은 초저유가에 기인한 것일까. 아니다. 이미 한국 경제는 활력을 잃었다. 'D(디플레이션)의 공포'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이미 한국 경제도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같은 불황에 진입했는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한국 경제가 디플레이션 국면에 들어갔고, 생산가능인구 감소 등 구조적인 요인에 의해 과거의 고성장이 불가능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디플레이션은 이렇게 조용하게 다가오고 있다. 마치 도둑처럼 말이다. 한국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의 2년차 또는 3년차에 접어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디플레이션이 미래에 다가올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한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 경제당국이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우선, 소비는 스스로 회복할 힘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정부가 1분기에 재정을 집중적으로 투입해 내수 회복세를 이어가려고 하는 것도 이 같은 위기감에서다. 정부는 지난해 가을 '코리아블랙프라이데이'를 도입하는 등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지속하는 등 소비심리를 꺼트리지 않기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 올 설 연휴를 앞두고서도 온누리상품권을 10% 할인해 판매하는 등 소비 붐을 조성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공공부문 투자와 예산 조기집행으로 투자와 소비심리를 되살리기에는 한국 경제가 너무 커졌다.

소비부진은 저출산 고령화 등 구조적 요인에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직장인들은 퇴직 이후를 대비해 소비를 줄이고 있고, 부동산 가격 붕괴 등 우울한 시나리오를 예상하는 전문가들은 늘어가고 있다.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정부의 복지정책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개인연금 등을 통한 노후 준비를 충분히 하고 있는 가계도 많지 않다. 미래 지출을 걱정하는 가계는 지갑을 닫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2%대 저성장 국면에서 가계 소득을 늘리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GDP 성장률 및 수출의 GDP 성장률 기여도(자료: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4년까지 한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수출의 침몰도 디플레이션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 지속적인 수출부진에 이어 지난달에는 수출이 무려 18.5%나 줄었다. 중국 경제 침체, 산유국 등 신흥국 경제 몰락, 한국 상품의 수출경쟁력 저하 등 한국 수출은 사면초가에 빠졌다. 중국 경제는 올해 7% 성장도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고, 유가가 급속도록 오르지 않는 이상 산유국의 경제위기도 지속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들 악재들이 1~2년 내에 과거 수준으로 회복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주요 국가들의 환율 전쟁은 한국 상품의 경쟁력을 더욱 떨어뜨리고 있다. 게다가 한국 기업들은 산업·기업 구조조정의 소용돌이를 피하기 어렵다. 이미 조선, 기계 등 핵심 업종의 기업들이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다.

정부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 디플레이션에 대응할 정책 수단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재정과 세제를 통해 경기를 되살리기는 역부족이다. 이미 쓸 만한 카드는 다 썼다. 대규모 재정 투입을 마중물로 해 민간부문까지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최근 3년 간 확인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디플레이션은 통화당국에서 대응해야 한다"면서 "금리와 통화량 조절을 통해 선제적으로 대응해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만간 금리인하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많아지는 것도 이런 필요성이 부각된 때문이다.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국회 등 정치권의 각성도 필요하다. 포퓰리즘에 빠진 정책을 만들고, 이념과 정쟁의 정치를 좇으면서 정치권은 경제를 희생물로 삼고 있다. 여야 간 합의된 법안 처리도 정쟁에 휩싸여 몇달 동안 통과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도한 선명성 경쟁과 이념 논리에 빠진 정치부터 구조조정하지 않으면 우리 경제는 더 깊은 늪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지적이다.

세종=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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