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훈의 스포츠+] 전설의 유니폼 넘버, 11..자존심 하나로 버틴 '무쇠팔'최동원

박태훈 입력 2016. 2. 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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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훈의 스포츠+]

◇전설의 유니폼 넘버, 11번의 주인공…②자존심 하나로 버틴 '무쇠팔'최동원

최동원(1958년 5월 24일 ~ 2011년 9월 14일)은 금테안경을 쓴 날카롭고 깨끗한 인상만큼이나 한국야구사에 또렷하고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야구사에 손꼽히는 정통파 투수이자 혼자 한국시리즈 4승을 책임졌던 슬픈 무쇠팔이기 때문이다.

김시진-김용남과 더불어 투수 삼국지, 선동렬과 용호쌍박의 대결을 펼치며 1970~1980년대 투수 황금기를 이끈 전설속 주인공이다. 

▲ 자신을 버리고 팀을 위해 던지고 또 던진 슈퍼스타

최동원하면 제일먼저 떠 오르는 것이 연투이다.

선발투수는 엄청난 중노동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메이저리그가 5선발 체제를 꾸려 가는 것은 최소 4일을 쉬어야만 그래도 몸에 무리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5선발제도 뛰어난 팀닥터, 마사지사 등 지원스태프가 있다는 가정아래서 진행된다. 또 프로입단이전 혹사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최동원은 워낙 빼어난 스타, 집안으로 말하면 가난한 집의 걸출한 장남이었기에 던지고 또 던졌다.

경남중 시절 최고의 투수로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최동원은 경남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5년  9월17일 우수고교초청대회 때 당시 고교 최강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를 기록했다.

이어 바로 그 이튿날 선린상고전에 나와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등 17이닝 연속 노히트노런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최동원은 결승에서 중앙고를 3-2로 꺾고 팀에 우승을 안겼다.

보는 이들은 초고교급 투수, 야구사상 최고선수라면 감탄했지만 천재의 몸을 아껴줄 줄 몰랐다.

경남고 3학년때인 1976년  청룡기 고교야구 대회 승자 결정에서 군산상업고등학교를 상대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으며 완봉승했다.

연세대학교 시절에도 이틀 연속 등판하는 등 팀이 부르면 언제든 뛰어갔다. 

프로가 됐어도 무쇠팔은 여전했다.

1987년 5월 16일 최동원은 선동렬과 선발 맞대결을 펼쳐 15이닝동안 209개의 볼(선동렬 투구수 232개)을 던진 일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을 정도로 유명하다. 

여기에 오직 최동원만이 가진 기록은 △2년연속 200이닝-20승 (1984-1985) △ 2년연속 200이닝-1점대 평균자책점 (1985-1986) △ 2년연속 200이닝-1점대 FIP (1985-1986) △ 2년연속 200이닝-0점대 WHIP (1985-1986) △ 5년연속 200이닝-14완투-2점대이하 평균자책점 (1983-1987) △  5년연속 200이닝-14완투-2점대이하 FIP (1983-1987) 등이 있다.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년간 1209.1이닝, 76완투, 2.28평균자책점을 보였으며 1983년부터 1988년까지 6년간 완투율 75.2%를 기록했다.

요지는 많이 던졌고 그리고 잘 던졌다이다.

▲ 1984년 한국시리즌 40이닝 4승, 찬란하고 슬픈 이야기

최동원하면 빠지지 않는 것인 1984년 프로야구 정상을 가리는 한국시리즈 이야기이다.

최동원은 김일융-김시진-권영호 등 당대 최고투수 등을 상대로 혼자 팀을 책임졌다. 

최동원은 1984년 9월 30일 1차전에서 한국시리즈 사상 첫 완봉한 투수로 이름을 남겼다.

이어 10월 3일 3차전 완투승, 10월6일 5차전 완투패, 10월 7일 6차전 5이닝 구원승, 10월8일 7차전 완투승을 따냈다.

전무후무한 한국시리즌 5경기 출전 4승1패, 4경기 완투라는 기록을 세웠다.

놀랍지만 있을 수 없는, 있었서도 안되는 일을 해냈다.

이를 정리하면 △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승 4승 △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이닝 40이닝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선발 등판 4번 △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완투 4완투 △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선발승 3선발승 △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완투승  3완투승 △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탈삼진 △ 한국시리즈 선발 등판 4경기 연속 완투 이다. 

한국시리즈 최초 완봉승, 한국시리즈 최초 선발 전원 탈삼진 기록은 초라할 정도이다.

▲ "혹사, 그 시대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름 석자 부끄럽지 않도록"

혹사논란에 대해 최동원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무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세 글자에 부끄럽지 않게 맡은 바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고.

▲ 혹사하지 않았더라면

최동원이 만약 혹사 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대학졸업후 메이저리그 토론트 블루제이스로 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가정에 불과하지만 박찬호에 앞서 틀림없이 메이저리그에서 이름을 떨친 첫번째 한국인 선발투수가 됐을 것이다.

토론토는 최동원을 25인 로스터에 포함시키는 등 팀합류를 기정사실화 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영입에 실패했다.

최동원은 140km 중후반대 볼을 던졌다. 슬라이더, 브레이킹볼, 역회전 볼, 투심이 주무기였다.

최동원하면 떠 오르는 하이킥에 이은 빠른 손놀림은 공 빠르기를 실제보다 더 빠르게, 변화구 각도를 실제보다 더 크게 느껴지게 했다.

타고난 어깨, 피로회복력, 근력과 근지구력을 감안할 때 어린시절부터 쳬계적으로 관리를 받았더라면 150km초중반대의 패스트볼과 예리한 변화구, 이닝소화력 등 메이저리그 특급투수로도 손색없었을 것이다.

▲ 죽음도 막지 못한 최동원의 자존심

최동원은 프로야구 8시즌을 뛰면서 248경기 출전, 103승-74패-평균자책점 2.46-81경기 완투-15완봉승-탈삼진 1019개를 기록했다.

그의 마지막은 씁쓸했다. 선수협 파동으로 삼성 간판스타 장효조와 맞트레이드돼 고향을 떠나 1989년 삼성으로 와 2시즌을 더 던진 뒤 은퇴를 선언했다.

최동원은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으로 있던 2007년 대장암 초기 진단을 받았지만, 병세가 호전돼 2009년 야구계로 복귀했다.

하지만 2010년 병세가 악화돼 다시 야구계를 떠났다.

2011년 7월 22일 목동에서 열린 경남고와 군산상고 간의 레전드 매치에 모습을 보였던 최동원은 2011년 9월 14일 54세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 경남고 선배인 야구해설가 허구연씨가 대장암 악화 사실을 눈치챘으나 최동원은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끼치기 싫다. 모른척 해달라"고 부탁, 했다.

역시 그처럼 자존심 강하고 꼬장꼬장했던 장효조가 떠난 지 1주일 뒤 최동원은 타계했다.

롯데 자이언츠 구단은 2011년 9월 30일 구단사상 처음으로 최동원의 등번호 11번을 영구 결번하는 것으로 늦게나마 그를 기렸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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