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가 한국에서 80시간을 일했다면

장슬기 기자 2016. 2. 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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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에 비해 주당80시간 이상 근무자는 오히려 늘어…수직적하도급·군대문화가 문제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지난달 20일 IT노동자 양도수씨 서울행정법원으로부터 업무 스트레스와 결핵성 폐농양의 인과관계를 인정받았다. 산업재해를 인정받았지만 여전히 IT노동자들의 현실은 열악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에서도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와 같은 성공사례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지식경제부는 우수학생 100명을 선발해 최종 10명의 인재를 육성하는 방식을 내놨다. IT노동자들을 다시 경쟁에 몰아넣는 정책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IT콘트롤타워를 ‘미래창조과학부’로 이름을 바꾼 뒤 IT기반 일자리를 만드는 ‘창조경제’를 외쳤지만 그 실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한국정보통신산업노동조합(IT노조)가 지난 2004년 IT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조사했다. 주당 57.79시간으로 나타났다.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주당 40시간이다. 새누리당은 이에 연장근로 12시간에 특별연장근로 8시간까지 붙여 주당 60시간으로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2004년 조사이후 9년만인 2013년 IT노조는 다시 노동시간을 조사했다. 주당 57.3시간으로 30분가량 줄어들었을 뿐이다. 현실은 개선되지 않았다. 오히려 주간 80시간 이상 비율이 2004년 7.6%에서 2013년 12.2%로 상승했다. IT노조에 따르면 포괄임금 연봉제는 장시간 노동의 주원인 중 하나다. 연봉에 이미 시간외 수당이 포함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IT노조의 통계에 따르면 양도수씨처럼 주 80시간이 넘는 노동자는 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수당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양씨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같은데서 파업하면 ‘무노동 무임금’원칙을 주장한다”며 “그럼 추가로 근무했으면 돈을 줘야한다. ‘유노동 무임금’인가”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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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pixabay

노동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중요하다. IT노조에 따르면 2013년 기준으로 출퇴근 시각을 모두 기록하는 곳은 37.8%에 불과하다. 출근만 기록하는 비율은 20.8%였는데 이는 야근수당과 연관이 없었고, 나머지 40%이상은 기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당지급은 더욱 어려워진다. 초과근로시간을 정확하게 집계한다고 답한 비율은 10.8% 뿐이었다.

IT노조에 따르면 야간 수당 등이 지급되거나 대체 휴가가 주어지는 경우는 각각 2.3%, 2.5%에 그쳤다. 95%의 절대다수 IT노동자들은 일한만큼도 보상받지 못하고 있다. IT노동자들 중 약 82%가 만성피로에 시달리고 79%는 근골격계 질환을 가지고 있다. IT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한만큼 보상받고 열심히 일했으면 쉴 수 있는 권리다.

IT업계의 구조적 문제

그간 양씨 관련 기사가 종종 보도됐다. 해당 기사들을 보면 IT노동자들의 절절한 애환이 많이 담겨있다. “회사 문화가 군대식이잖아요. 정상적으로 업무가 잘 되는데 현장을 잘 모르는 임원 한명이 ‘이거 이상하다’이러면 중간관리자를 그냥 통과해서 업무 부담이 전산팀까지 넘어오는 거죠. 실제로는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업무들인데도.”

결국 산업구조와 문화의 문제다. 기술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중소 IT업체는 수직적 하도급 구조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대기업이 원천기술까지 요구하는 경우까지 있다. 프로젝트 기간을 단축하는 건 비일비재하다. 양씨는 “프로젝트 기간을 단축하면 일단 테스트 기간부터 사라지게 된다”고 말했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 충분한 테스트를 거쳐 보완해야 하는데 마감을 단축하면 그럴 시간이 없다.

“건축물의 경우 부실공사가 일어나면 눈에 보이잖아요. 철근이 없다거나 나무가 썩었다거나. 그런데 IT는 부실이 일어나도 전문가가 보기 전엔 몰라요. 그러니까 농협전산마비 같은 사건이 나면 북한에서 했다고 해도 알 길이 없는 거죠. 건축은 사고가 나면 국지적이지만 IT는 연쇄적이죠. 이에 대해 누가 관리를 할까요?”

2008년말 ‘소프트웨어 기술자 신고제’가 실시됐다. 실력있는 개발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해 하청업체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양씨는 “증명받지 못한 경력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존 개발자의 처우를 더 나쁘게 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제도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운영하는가’다. 공공기관이 하청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애초 소프트웨어 기술자 신고제의 취지는 사라진다. 양씨에 따르면 공공기관에 제안서를 넣을 때 IT업체들은 하청을 못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 군데 제안서를 넣게 되고, 때에 따라선 두 군데 이상 일을 수주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제안서에 있던 인력을 바꿔야 한다. 실제 초급인 개발자는 중급으로 ‘뻥튀기’되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공공기관은 제안서에 등록된 개발자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개발자에게 일을 수주하게 되고, 그렇게 프로젝트별로 들어간 개발자들은 빨리 일을 끝내줄 뿐 꼼꼼하게 신경 쓸 여력도 유인도 없다. 공공기관 전산망이 엉망인 이유다. 양씨는 “제안서에서부터 정규직으로 검증된 사람을 뽑아 일을 해야 하고 공공기관도 그런 곳에 일을 줘야 한다”며 “중간에 인력을 바꾸는 경우 불이익을 줄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재왕 소프트웨어개발환경 개선위원회 대표는 “개발자들의 근로환경이 이렇게 된 원인은 공공기관의 만연한 갑을 문화, 기업들의 무리한 가격경쟁, 군대식 관리 방식”이라며 “창의성이란 개발자들이 인문학, 예술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사람과 교류할 때 나오지 책상에 늦게까지 있는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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