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아들 집에 가긴 가는데.. 발길이 무거워"

오병종 2016. 2. 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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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급식소 밥차 현장] 고령화 사회 어르신들의 설 명절 풍경

[오마이뉴스오병종 기자]

"설이, 설이 아니여~"
"설은 뭐 별거 있간디?"
"또 나이 그냥 먹는 거여!"

어르신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이분들의 설 명절이 예사롭지 않다. 설을 앞두고 그동안 6년간 토요일마다 무료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가까워진 어르신들을 만나 올해 설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봤다.

▲ 자원봉사도 겸하는 장애인 형제들 동생 경환씨는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를 가진 2급 장애인이고, 형 또한 지적장애 2급이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이들 노총각은 여기서 점심을 해결한다.야외 식탁에 수저와 젓가락을 놓고 있다.
ⓒ 오병종
장애인인 김경환(43) 동환(50) 두 형제가 자원봉사자들 틈에 끼어 야외 식탁에 수저와 젓가락을 놓고 있다. 동생 경환씨는 지적장애와 지체장애를 가진 2급 장애인이고, 형 또한 지적장애 2급이다. 이들이 이곳 성산공원을 찾게 된 것은 4년 전 함께 사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면서부터다. 지난해, 78세인 어머니가 그만 계단에서 넘어져 뇌진탕을 앓다가 9월에 돌아가셨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여기서 점심을 해결한다. 형제는 이곳에 오면 밥만 먹지 않고 이렇게 가벼운 일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설 연휴 앞둔 주말인 지난 6일 성산공원 무료급식소에서는 두 형제외에도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사랑해 빨간 밥차'가 준비한 떡국으로 어르신들이 점심을 함께 드셨다. 영하를 오르내리는 추운 날씨인데도 야외에서 식사를 하면서도 어르신들이 좋아한다. 할머니 한 분의 얘기다.

"떡국을 미리 먹었으니, 오늘 한 살 더 먹은겨! 나가(내가) 8학년 3반! 허허허..."
"난 혼자여. 갈 곳도 없어. 누가 오지도 않고. 떡국도 안 끓여. 설이 뭐 별거 있간디..."

두 형제 중 말을 더 잘하는 동생 경환씨도 어눌하지만 그 말에 한마디 거든다.

"우리는 집에서 둘이만 살아. 교회에서 준 떡국이 냉장고에 있어. 형은 잘 못 끓여... 내가 해. 설에 우리 갈 데 없어... 공원묘지. 어머니! "

설날이면 어머니가 끓여주던 떡국을 먹었는데, 이제 장애인 노총각 형제 둘이서 설 명절을 맞이해야 한다. 둘이서 처음 맞는 설이라며 걱정을 해줬더니 곁에 와서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철부지처럼 부탁한다.

"근데요, 장가 좀 가게 해줘요. 집에 각시가 없어. 설날 어떻게 해?"

▲ 여수시 화장동 성산공원 야외무대에서 주 2회 '사랑해 발간 밥차'의 무료급식 설을 앞둔 6일 자원봉사자 40명이 180분 어르신들에게 떡국 급식을 돕고 있다. 무료급식 이동 밥차는 3월에 1000회를 맞는다고 한다.
ⓒ 오병종
밥차는 봉사자들이 이끌어 간다. 여수에서 규모가 제일 큰 '모두모아 봉사대'의 자원봉사자들은 공연으로 어르신들의 식사 기다리는 무료함을 달래준다. 국악인 정원자씨는 노래를 마치면서 일행과 함께 세배까지 올려주니 박수소리가 요란하다. 이어서 아들의 섹소폰 연주에 아버지는 무대 사회자로 부자가 함께 공연봉사를 한다. 아버지 김유수씨는 고등학교 진학할 아들 용태의 색소폰 연주가 대견하고 흐뭇하기만 하다.

식사가 나오기 전 평소 인사를 나누던 몇 분을 만나서 얘기를 나눴다. 다정한 인사를 나누지만 속 사정까지야 알 턱이 없는 어르신이 대부분이다. 설날 앞두고 편하게 이것저것 여쭤봤다.

이성유(가명,79)어르신은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편을 잡다가 63세에 퇴직한 후 여수로 왔다. '설에는 집에 누가 오는지, 어르신이 어디로 가시는지' 물었다.

"누가 안 와요. 나는 고향 보성에 갈거야. 설 전날 갔다가 설날 다시 와야지. 동생이 사는데, 부모 묘소가 있으니까 가야 해. 내가 큰 아들인데, 고향에 안사니까 동생한테 가는 거여. 언제까지나 다닐지..."

몸이 늙어가는 자신의 처지로는 앞으로 부모 묘소에서의 세배가 걱정이 되는가 보다. 혼자 사실까?

"할멈하고 같이 사는데, 관절이 아파서 할멈은 어디를 못 다녀. 고향에도 나 혼자만 가야돼. 나도 병원에 3일에 한 번씩 다녀. 전에 교통사고가 났거든. 교통사고 때문에 교직생활 퇴직금을 거의 다 써버리고 연금으로는 적게 책정해 놔서 연금이 아주 적은 편이여. 그래도 아들 며느리가 집 옆에 사니까 자주 와서 시장도 봐 주고, 반찬도 해주고 그래. 안 그러면 못살지."  

▲ '모두모아 봉사대'의 공연 봉사 국악인 정원자씨가 무대를 마치면서 큰 절로 어르신들께 세배를 올리고 있다. 이날 자원봉사자는 무대, 공연 봉사 외에도 평소 20여팀 100~300명 자원봉사자가 1회 평균 200명에게 급식을 제공한다.밥차의 핵심은 모든게 '봉사'와 '기부'로 운영된다는 점이다.
ⓒ 오병종
공무원 출신 할아버지도 옆에 계신다. 올해 79세 동갑인 신성건·김선엽씨 내외는 이곳 고객 중 드물게 늘 부부가 함께 다닌다. 과거 수산청 사무관 출신으로 정년했다. 수도권에서 1남 1녀가 가정을 이루고 산다.

"둘 다 결혼해서 아들은 대기업에 근무하고, 딸은 고등학교 교사야. 얘들은 걱정없는데, 공무원 연금을 적게 책정했더니 연금이 생각보다 적어. 이렇게 오래 살게 되고 노후문제가 중요하다고 여겼더라면 퇴직금을 몽땅 연금으로 해둘 것인데 후회되네. 애들은 잘 살아도 서울서 쟤네들 살기에 바빠요. 내가 손도 안벌리고 도움 받을 생각은 안 해.

지금 서울서 아들 내외가 손자들 넷이랑 출발했다네. 손자들이 오니까 반가워. 기다려지고…. 하하하. 손자들 새뱃돈 줄려고 다 준비했지."

떡국이 배식된다. 여기저기 김이 올라오는 떡국을 드시느라 공연은 그냥 박수없이 배경음악이 되어버렸다. 몸집이 풍성하면서 늘 웃는 얼굴인 송소희(가명, 81)할머니도 떡국상을 받았다. 나이를 물으면 주민등록증 나이를 강조하신다. 아마 두서너 살 더 잡아야 할 나이인데도 얼굴은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

"이번 설에 서울로 올라가시나요? 아니면 자녀들이 내려 오나요?"
"둘째 딸 만 와. 2녀 1남인데 아들이 스포츠센터 하다가 어려워져서 세금도 못 내고 신용불량자여. 진즉 사업 접었고, 자식들 학비에 무척 힘들거야. 설이나 제대로 쇠겄어? 또 큰 딸은 암투병 중이라 걱정이야. 설 쇠러 온다는 둘째 딸은 호랑이띠(54). 근데 아직도 혼자 살아. 갈 시갓집이 없으니까 나한테 오는 거지."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30년 넘게 혼자 사신다는 할머니도 전화번호를 주신다.

"동사무소나 노인복지관에서 노인 일자리를 곧 심사하거든. 거기 되도록 좀 도와줘. 내 전화 번호도 꼭 수첩에 적어두고, 꼭 일자리 좀 도와줘."

월 20만 원으로 책정된 정부의 노인일자리 사업중에 노인복지관의 위탁사업 면접 심사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나 보다. 그걸 기억하시고는 나에게 청탁(?)을 하신다.

▲ 설을 앞두고 쓸쓸히 역귀성하는 할아버지 아들들이 요즈음 서울에서 살기 힘들어진 상황이다 보니 서울로 가는 발길이 무겁기만 하다. 서울행 열차를 타러 여천역으로 가는 뒷모습도 무겁다. 여수에선 혼자 보내기가 싫어서 서울을 가긴 가지만...
ⓒ 오병종
노인일자리 얘기를 듣고는 박성수(가명, 83) 할아버지가 나이 들면 가진 돈이 있어야 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어르신은 돈이 많나 봐요?" 주변에서 다그친다.

미소만 짓고 말이 없다. 작은 체구지만 얼핏 봐도 노동으로 다져진 몸처럼 느껴진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여수산단에서 경비업무등 직장생활을 25년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농사를 몇백 평 짓고 혼자 살아. 아들 며느리는 집 옆에 살지. 가끔 집에 와서 도와줘. 딸도 오고. 내 돈은 내가 갖고 있어. 자식들 안줬지.  마누라 죽고 혼자 산지 10년 됐나? 주변에서 할멈을 소개해준다고도 그래. 같이 살자고도 하고. 아이고! 성가셔. 싫어. 이 나이에 복잡해. 나 혼자 살아도 설 명절에는 애들이 다 찾아오니까, 걱정 없어."

여수 변두리였지만 이제 도심지가 된 토박이인 듯하다. 땅도 있고, 직장생활하며 벌어 둔 재산도 있고, 그래서인지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늙으면 자기 돈은 자기가 쥐고 있어야 돼. 당신도 나중에 내 나이 먹어봐. 나 같은 말 할 거야. 하하하. 설날 나 혼자 살아도 아들 딸 다 와!"  

다부진 체격만큼이나 자신감 넘친다. 그러고 보니 성산공원 밥차 어르신 노래자랑 때가 생각난다. 박 어르신이 노래를 부르는데 음정·박자를 제대로 못 맞추는데도 마이크 잡고 큰소리로 끝까지 한 곡 다 부르고는, 다른 노래를 또 이어서 부르려고 하자 사회자가 제지했던 적이 있다.

이제 식사는 끝나가고 더러는 빈 그릇을 들고 잔반 처리하는 곳으로 향하는 분도 계신다. 통로 한쪽에 전동 휠체어를 의자 삼아 아주머니 한 분이 아저씨와 식사중이다. 평소 늘 함께 다니는 부부로도 근동에선 유명한 분들이다.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1급인 강춘현(62)씨와 남편 유도선(66)씨다. 아저씨는 2009년도에 뇌출혈로 쓰러진 후 두 차례나 수술받아 말을 못한다. 육체는 별 이상이 없이 건강한 편이지만 말을 못하는 남편과 전동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강춘현씨는 어제 이 곳 밥 차에 쌀 한가마니를 기부했다.

"만날 아저씨 모시고 여기 와서 식사를 하니까 미안하더라고요. 최근에 장애인 작업장이 생겨서 거기 나가서 한 달에 10만 원씩 벌게 되었거든요. 그 돈으로 쌀을 구한 거예요.

저는 친정 부모님이 안계셔요. 고향인 경북 영주에서 농사짓는 작은 아버지가 한 분 계시는데 농사지으면 늘 쌀 한 가마를 저한테 부쳐줍니다. 내가 번 돈으로 작은 아버지에게 송금하고, 부탁해서 한 가마 더 부쳐달라고 해서 여기다 준 거예요. 여태 밥 먹은 걸로 치면 별거 아녜요." 

▲ 전동휠체어를 의자삼아 식사하는 강춘현씨 부부 설 명절에는 늦게 둔 딸들이 여수와 순천에서 직장생활하는데 네 식구 오븟하게 맞을거라고 한다.쌀 한가마라도 기부한 게 마음이 무척 편하다고 한다
ⓒ 오병종
이곳 무료급식소는 예전에 장날 야외에서 '국밥장터'가 반짝 서는 형태와 유사하다. 공터에 야외 식탁이 깔리고, 밥차에서는 떡국을 끓이고, 식사 대접 후엔 설거지 까지 다 마치면 다시 공터가 된다. 이 '반짝식당'은 벌써 7년째 이어오고 있다. 나 역시 때 마침 주 5일 근무가 되면서 처음 시작할 때부터 여기서 주말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여기는 국가나 자치단체 예산으로 운영하는 게 아니고 모든 게 기부와 자원봉사로 유지된다. 밥차를 운영하는 여수노인복지관 김진우 관장의 얘기다.

"처음에는 주 1회, 점차 늘려 지금 주 3회 출동합니다. 2009년도 5월부터 시작했으니까, 3월이면 곧 1000회가 됩니다. 매번 자원봉사자들이 돕습니다. 비용이나 식재료 역시 기업체나 개인들이 기부하고요. 어려운 어르신들의 '점심 나눔 공동체'라고 보면 됩니다. 전체적으로 봉사와 기부로 운영된다는 점과 끊기지 않고 1000회를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지역사회의 건강성이 대단한 거죠.

오늘 떡국을 드신 어르신 분들이 180분 정도 됩니다. 평소 대락 200명 정도 찾아오시죠. 봉사자들은 단체별로 날짜를 잡아서 안 겹치도록 주 단위, 월 단위로 배치를 했습니다. 단체 봉사자만 20개팀이 넘구요, 인원은 100명에서 300명 정도 됩니다. 개별 봉사자도  수백 명 되고요."

이날 매월 첫 주를 맡아주는 여수 백병원에서 봉사자들이 12명이 참여했다. 지금까지 7년째 이어어고 있는데, 봉사뿐 아니라 병원 구내 식당에서 마련해온 반찬까지 가져오고 있다. 그리고 허드렛일은 물론 공연과 음향까지 봉사해준 '모두모아 봉사대'에서 13명이 도왔다.  나를 포함한 개별적으로 참가한 봉사자들이 15명 정도. 모두 4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오늘 함께했다.

마무리하고 오는 길에 열차로 역귀성 하실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같은 방향이어서 여천역까지 모셔다 드렸다. 평소에도 무료급식소에서 가끔 대화를 가끔 나눈 분이라서 어려움 없이 쉽게 차를 타신다.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시는 분이어서 한국전력에서 퇴직한 후 개인 사업도 하시다 은퇴했고, 할머니와는 떨어져 혼자 사신다는 것 까지 알고 있는 분이다. 궁금한 것도 물어볼 겸 장만오(가명, 74) 할아버지에게 차 안에서 말을 걸었다.

"차표는요? 몇 시 열차로 끊으셨나요?"
"역 귀성은 안 복잡하다네. 예매 안했어. 그냥 가서 되는대로 차표 끊을려고..."

말씀을 하시는데 평소와 달리 별로 힘이 없으시다.

"할머님하고 같이 안 사신다고 그랬죠?"
"두 아들하고 딸이 서울 사는데, 손자들 키우느리고 서울로 올라간 뒤로는 나 혼자 20년 넘게 여수서 살았어. 물론 오고 가기는 하지. 한전 다닐 때 서울서 살다가 여기서 사업하느라고 나만 혼자 살았지."

두 아들도 대학까지 보냈고, 둘째는 박사까지 마쳤다. 딸도 잘 산다고 했다. 왜 힘이 없을까?

"자식도 만나고, 손자들도 보고, 좋겠습니다. 새뱃돈 두둑해야겠는데요?"
"그러면 좋겠는데, 그럴 형편이 못돼. 나도 한전 다녔고, 나와서는 또 사업도 하고, 잘 나갔지. 그런데 자식들에게  집 사는데 도와주고 하느라고, 어려워. 사업할 때는 늘 잘될 줄 알았지. 이렇게 늙고 힘없이 될 줄은 몰랐어. 노후대비 잘 했어야 하는건데. 남은 건 여수 집 한 채여. 자식들 집 사주고 도와준 것하고..."

"아들들이 대기업 다닌다고 안했나요?"
"박사까지 마친 둘째가 간암이여. 회사 임원인데, 이젠 지 몸 간수하기도 어려워. 아이들도 어리고 그래서 마누라가 거기 가 있어. 그래서 둘째는 나를 못 도와 준지 오래됐지. 큰 아들만 그동안 용돈 10만 원씩 줘서 살았는데, 큰 아들도 새해들어 문제가 생겼어. 대기업 다녔는데, 2015년 말로 회사 명퇴하고, 자회사 어디로 나가기는 나가는가 봐. 형편이 어렵게 되었어. 아들 용돈 10만원에 노령연금이 전부여서 나는 1500원짜리 복지관 밥도 못사먹어. 허허허... 이제 아들 용돈 10만 원도 어려울 것 같어."

거기다 좋은 아파트 장만한다고 하면서  빚을 낸 큰 아들은  '하우스 푸어'라고 걱정이 태산이다.

"아파트 값이 꼭대기로 제일 비쌀 때 50평짜리로 옮겨서 샀는데, 내가 돈도 도와주고 대출도 받았어. 근데 아파트는 안 오르고, 또 안 팔리고... 대출 이자 갚느라고 힘든가 봐.거기다 명퇴까지 했으니. 그래서 올해는 설이 설이 아니고, 아들 집에 가는 데도 발길이 무겁고, 가고 싶지가 않네. 그래도 명절인데 여기 혼자 있기가 싫어서 가기는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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