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과 음력의 120년 질긴 동거, 왜?

윤창희 2016. 2. 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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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력과 음력의 동거가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1886년 부터다.

1895년 고종 때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이듬해 1896년 1월1일부터 양력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날은 음력으로 1895년 11월7일이었다. 조선이 양력을 도입하는 바람에 음력 개념인 을미년은 40여일을 남겨두고 갑자기 사라졌다.

서양식 양력이 도입됐지만, 한국인들은 음력 전통을 버리지 않았다. 이 뿌리 깊은 음력 전통의 상징인 음력 설,이른바 구정이 올해는 2월 8일, 설날이다. .

한 때 양력 설이 대세인 때도 있었다.

일제는 음력 설을 금지하고 양력 설을 쇠도록 했다. 음력 설에는 관청이나 학교의 조퇴를 금지하고, 떡 방앗간을 못 돌리게 했다.

해방 이후에도 양력설을 장려하는 정책은 계속됐다. 양력 설을 공식 설로 정하고, 1949년 1월1일부터는 사흘간의 연휴를 보장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양력 설 중시 정책이 더욱 강해졌다. 양력 설은 3일 연휴였던 반면, 음력 설은 아예 평일로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75년 국무회의에서 "이중과세(二重過歲. 이중으로 해맞이를 하는 일)가 없도록 국민을 지도,계몽하고 공무원부터 솔선수범 하라"고 지시했다. 78년 최규하 국무총리는 "구정에 공무원이 정시에 출퇴근을 하는지, 근무 중 자리를 뜨지는 않는지 철저히 감시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

정부가 양력 설을 계속 권장한데다, 음력 설이 평일로 되면서 양력 설을 쇠는 사람이 늘었다. 70년대만 해도 귀향 행렬은 주로 양력 설에 이뤄졌다.

그럼에도 음력 설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일이라는 불편에도 불구하고, 음력 설에 차례를 지내고 친척들이 모이는 집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80년 들어 각종 선거를 치르면서 음력 설 부활은 선거 공약으로 내 걸리기 시작했다.
전두환 정권 때인 1985년 음력 설은 공휴일로 재지정됐다. 명칭은 '민속의 날'로 명명됐다.

음력 설이 '설날'이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노태우 대통령 때다.

노 대통령은 1989년 2월 '설날'이라는 명칭을 복원하고, 3일간의 연휴를 지정했다. 이 때부터 음력 설은 양력 설을 누르고 다시 대세가 됐다.

김대중 대통령 때인 1998년 12월에는 규정을 개정, 양력 1월 1일을 아예 '설'이 아닌 '1월1일'로 규정하고 공휴일도 하루로 축소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음력 설은 우리 민족의 설로 이미 확고히 자리 잡았다. 우리 민족에게 뿌리깊은 음력 설 전통에다 양력 설은 딱 하루, 음력 설은 길게 5~6일의 연휴가 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결과다.

하지만 양력 설이 더 합리적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다. 이미 양력이 생활에 뿌리 깊게 박힌 상황에서 양력 설이 쇠는 게 더 새해 느낌이 난다는 주장이다.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2006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직도 양력 설을 쇤다는 응답자가 8%, 둘다 쇤다는 사람이 3.2%였다. 전체 국민 10명 중 1명은 양력 설을 쇠고 있다는 얘기다.

윤창희기자 (theplay@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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