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섭의 링사이드산책] 역대급 학원스포츠팀 ? 복싱은 '80년대 리라공고 4인방'

2016. 2. 6.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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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8일 작고한 프로야구 초대 구원왕 황규봉 씨.

야구의 경북고, 축구의 청구고, 농구의 연세대

얼마전 한시대를 풍미했던 전 프로야구 선수 황규봉(1953년생 한국화장품-삼성) 씨가 지병으로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활약했던 고교야구 역사상 최고의 멤버를 구축했던 1971년 경북고가 생각이 났습니다. 당시 경북고 야구부는 투타의 핵이었던 남우식을 비롯하여 황규봉 이선희 배대웅 천보성 정현발 구영석 함학수 박찬 등 기라성 같은 멤버들이 포진했죠. 중앙에서 열린 4개대회(대통령배 청룡기 황금사자기 봉황기)를 석권했고, 그것도 모자라 부산에서 개최된 화랑대기대회마저 정상에 오르며 사상 초유의 5관왕을 달성했습니다. 그야말로 황금멤버였죠. 당시 감독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영무 씨로 지금까지도 고교야구의 신화적인 인물로 남아있습니다.

1979년에는 대구 청구고 축구팀 역시 사상 초유의 전국대회 5관왕의 대업을 이룩했습니다. 변병주 박경훈 백종철 백치수 등 61년생 4인방이 공수 양면에서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볐고, 상대팀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변병주는 연세대로, 백종철은 경희대로, 박경훈과 백치수는 한양대로 진학했는데 이들 4명은 향후 모두 국가대표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농구에선 연세대학교가 사상 최초로 대학팀 농구대잔치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신촌 독수리 5형제’인데요, 센터 서장훈을 필두로 문경은 우지원의 쌍포에다가 스마일 슈터 김훈의 외곽포와 송곳같은 패스를 구사했던 당대 최고의 가드 이상민, 그리고 김택훈 구본근 석주일 등으로 연결된 식스맨이 오빠부대를 끌고 다녔습니다. 당시 연세대 농구감독이었던 최희암 씨 또한 연예인 못지않는 인기를 누리며 CF까지 출연했습니다.

공포의 88학번

서울시체육회 소속 22개팀을 총괄하는 이창환 팀장.

이제 본론인 복싱 얘기입니다. 복싱의 학원스포츠 신화는 1980년대 중후반 리라공고 황철순 사단이 만든 ‘공포의 88학번 4인방’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진호(리라공고-동아대) 이창환(리라공고-서울시청) 조인주(리라공고-동국대) 박기홍(리라공고-동아대), 이렇게 4명이 주인공입니다(황철순 스토리는 이미 이 칼럼을 통해 자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들 4명은 1985년부터 1987년까지 리라공고 복싱팀 소속으로 각종 전국대회에서 무려 2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모두 초고교급 복서들이었죠. 이들은 한국을 넘어 세계청소년복싱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이들의 성적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인데 특히 졸업반인 1987년에는 쿠바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복싱대회에 이창환(LF) 조인주(F) 박기홍(B)이 나란히 출전했고, 본선에서 조인주가 당당하게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동양챔피언 김진호

OPBF 미니멈급 챔피언 김진호.

먼저 김진호(68년생 서울)는 고교 2,3학년 때 가장 권위 있는 김명복박사배에서 2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전국체전도 석권한 코크급(45kg) 부동의 1인자였죠. 동아대 진학 후에도 제19회 대통령배 시도대항대회에서 우승(48kg급)과 함께 최우수선수상을 받았죠. 대학 4학년 때인 1991년 한미국가대표대항전(하와이)에서는 1989, 1991 세계선수권 2연패에 빛나는 미국의 에릭 그리핀을 꺾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

김진호는 1992년 프로에 데뷔해 단 4전 만에 루디 이다노를 8라운드 KO로 꺽고 OPBF 미니 플라이급 챔피언에 등극했습니다. 이어 1994년 5월 로멜 라와스와의 동급 방어전에서 국내 최단시간 KO승(1라운드 24초)을 연출해 화제가 됐습니다. 아쉬운 것은 1995년 1월 32전 전승(13KO)의 차나 포파우잉과 WBA 미니멈급 세계타이틀매치(태국 방콕)를 벌였지만 판정으로 패한 것입니다.

은퇴 후 복싱계를 잠시 떠나기도 했던 김진호는 현재 인천에서 복싱체육관을 운영하며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도자 중에 한 명이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는 대학과 체육관(현대) 선배인 ‘2체급 석권’의 최희용보다 테크닉이 좋아 성장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세계 정상의 고지는 신의 허락(?) 없이는 등정을 허락하지 않는 오묘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창환

1990년 아시안게임 선발전 당시의 이창환.

LF급에서 전국을 평정했던 이창환(1969년생 화순)은 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6학년 때 어머니마저 잃은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복서입니다. 그래서 큰형이 있는 서울로 상경하여 근처에 있는 한화체육관에서 복싱을 수련했는데 그때가 대경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어린 소년은 가슴의 뭉친 응어리를 풀고 싶었을까요? 한맺힌 분노의 주먹은 1984년 전국대회 3관왕으로 이끌었고, 그 중 2개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했습니다. 그만큼 독보적이었죠. 어린 이창환에게 외로움을 달랠수 있었던 것은 샌드백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985년 리라공고에 입학한 이창환은 1986년 김명복박사배와 88꿈나무선발전에서 거푸 우승하면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고, 1987년 청소년대표 선발전 결승에서 동명공고의 이은식(1970년생 부산)을 꺾고 우승했습니다. 참고로 이은식은 다음 대회인 김명복박사배에서 우승한 후 바로 프로행을 선언했습니다. 이창환에게 당한 1패가 치명적이었던 것이죠.

그후 이창환은 서울시립대 2학년 때인 1989년 킹스컵 결승(F급)에서 당시 ‘동양의 진주’로 불리던 아시아 최고의 복서 비차이 카드포(태국)와 맞붙어 치열한 접전을 펼쳤습니다. 판정으로 패했지만, 오히려 가능성을 인정받고 국제무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대에 부응한 것일까요? 이창환은 이듬해 서울컵대회 준결승에서 다시 만난 카드포에게 깨끗히 설욕하면서 1승 1패로 균형을 맞춥니다.

이창환은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 선발전 결승에서 한체대의 조동범과 맞붙어 한 차례 다운을 빼앗는 등 25-12로 완벽한 승리를 거두며 만개한 기량을 뽐냈습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준결승에서 숙적 카드포를, 결승에서 리티프(파키스탄)를 꺾고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당시 서울 시립대 3학년이었던 이창환은 그 경기를 끝으로 사실상 복싱과 안녕을 고합니다. 카드포는 이창환이 복싱계를 은퇴하자, 1992년도 서울컵과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 연달아 MVP를 받으며 우승했습니다. 특히 아시아 선수권대회에서는 후에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가 되는 북한의 최철수를 꺽을 정도로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아마 이창환이 1992년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출전했다면 비차이 카드포, 최철수와 ‘골든 트라이앵글’을 형성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창환의 이른 은퇴가 아쉬운데요, 그 이유를 묻자 “17살 때부터 태릉에 입촌하여 다람쥐 쳇바퀴 도는 훈련에 염증과 권태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올림픽 출전의 유혹과 끊임없는 프로행 스카우트 제의도 냉정히 마다한 것이죠. 1990년 12월 체육훈장 백마장을 수상한 이창환은 1993년부터 서울시청에 근무했는데 현재는 서울시체육회 산하 22개 종목을 총괄하는 수석팀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은사였던 리라공고의 황철순 감독을 서울시청의 지도자로 영입하는 오작교 역할을 하기도 했죠.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지 몰라도 그는 깍듯한 예절과 논리정연한 화법, 포용력 등 주변의 평판이 상당히 좋습니다. 그리고 그의 스승인 황철순 감독은 시청팀을 맡으면서 세계선수권 은메달리스트 신종훈,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한순철,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염종길 등을 길러내며 제자의 성원에 화답했습니다.

세계챔피언 조인주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조인주.

조인주(1969년생 담양)는 1987년 세계청소년대회 은메달에 이어, 그해 12월 제41회 전국선수권대회 플라이급에서 우승하면서 국가대표 수준으로 실력이 향상됩니다. 1990년 서울컵에서는 준결승에서 고교생 박덕규에게 발목을 잡히며 부침을 겪기도 했지만 그해 벌어진 인도네시아대통령배 결승에서 유럽선수권자이자 월드컵대회 금메달리스트인 누마노프(러시아)를 꺽으면서 세계적인 복서 반열에 오릅니다. 또한 1991년도 한미국가대표대항전 선발전에서 염종길(문태고)을 꺽고 우승함으로써 안정된 입지를 구축했습니다.

조인주가 복싱을 하게 된 동기는 4살 위의 누나가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인 조민숙(1964년생, 조대부고-포철) 씨 때문입니다. 누나가 고교시절 아시아주니어선수권에서 단복식을 석권하며 커다란 트로피를 가져오자, 조인주는 나도 커서 누님처럼 인정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결심하고, 선택한 종목이 복싱이라고 합니다.

조인주는 1992년 프로에 데뷔, 1998년 8월 제리 페날로사(필리핀)을 꺽고 WBC 슈퍼플라이급 세계 정상에 올랐습니다(5차방어 성공). 참고로 3차와 6차 방어전은 일본에서 치렀는데 그때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같은 이창환이 동행하여 세컨을 봐주었다고 합니다. 경기가 끝나면 당시 프로모터인 이거성 회장이 1억 원에 육박하는 현찰을 곧바로 건넸는데, 조인주는 이창환에게 상당액을 수고비(?)로 주었다고 합니다. 조인주는 동국대 시절 가끔 친구들과 술자리를 어울리면 자리를 주도하는 편이라 항상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친구인 이창환은 시청에 근무하여 봉급이 나오는 신분이었기에 수시로 조인주의 용돈을 끊임없이 조달해줄 정도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이었는지 조인주도 자신의 세계타이틀매치에서 화끈하게 화답한 것이죠.

아무튼 조인주는 박찬희-변정일-문성길에 이어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프로복싱 세계 정상에 올라선 4명 중의 한 명입니다. 나름 프로 20전을 뛰면서 4억 원에 육박하는 파이트 머니를 받았는데, 프로 생활 내내 스폰서를 구해 일정하게 월급을 지급해준 이거성 회장에게 감사하다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조인주는 주변에서 “권투도 국가대표였지만 사람 됨됨이도 국가대표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좋아 지인들의 감언(?)에 넘어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체육관을 10년 이상 운영했지만, 지금은 후배에게 물려주고 리라공고 친구인 박기홍과 룸메이트가 되어 여의도에서 체육관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꿈을 묻자 조인주는 “건물 하나를 사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독자적으로 선수를 한번 키워보겠다”고 합니다.

한국챔피언 박기홍

제66,67회 전국체전 밴텀급 금메달 리스트 박기홍.

4번째 주인공 박기홍(1969년생 전남 벌교)의 외삼촌은 전 플라이급 동양챔피언이자 세계랭커였던 원진체육관의 양홍수(52년생)입니다. 유년기 때 전남 벌교에서 서울로 올라와 삼촌 가방을 들고 체육관을 두리번거리면서 복싱에 관심을 가지게된 박기홍은 1985년 황철순 사단의 리라공고에 입학하면서 복서로 꽃을 피웁니다. 고등학교 2,3년때는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했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1985년 세계청소년대회 금메달리스트인 밴텀급의 황경섭(서원대)을 제압하는 등 뛰어난 동체시력과 빠른 원투스트레이트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1992년 프로로 돌아 2년 만에 장인만를 꺽고 주니어밴텀급 한국챔피언에 등극했지만 곧바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동아대 코치로 재임하면서 임계룡 강성오 등 두 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하면서 지도자로 능력을 인정받았죠.

그런데 박기홍은 이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개인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는 부천 중동에 300평 건물을 사들여 복싱장을 운영하고 있고, 여의도 중심지에는 조인주와 함께 복싱 체육관을 같이 운영하고 있습니다. 박기홍의 주업은 동대문시장에 위치한 해양아동복쇼핑몰센터를 총괄하는 보안팀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복서 출신의 성공한 인생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박기홍이 제게 그러더군요. 선수생활을 열심히 한 것처럼 사회생활도 열심히 하면 결과는 똑같이 나온다고요.

이 4명의 복서들중 3명은 프로로 돌아 한 명은 세계챔피언, 한 명은 동양챔피언, 또 한 명은 한국챔피언을 최고 성적으로 냈죠. 프로행을 선언하지 않은 이창환은 서울의 체육행정을 총괄하는 중역을 담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보기 좋은 ‘리라공고 황금의 4인방’입니다. 앞으로도 그들이 좋은 우정을 이어가길 바랍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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