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 또 죄송".. 명절이 더 괴로운 감정노동자

김현빈 입력 2016. 2. 6.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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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 안되면 가만두지 않겠다"

"안 막히는 길 빨리 알려달라"

평소보다 과도한 요구 시달려

명절 특수에 목멘 호텔·유통업체

"무례한 손님에도 친절" 매뉴얼

밀려드는 일, 부족한 일손, 고객의 냉대 속에 설에도 일을 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은 연휴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게티이미지 뱅크

“명절이라 즐겁지 않냐고요? 저희에게는 죄송할 일만 늘어나는 날이에요.”

설 연휴를 하루 앞둔 5일 한 홈쇼핑업체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김정은(31ㆍ가명)씨는 출근을 앞두고 두통약부터 찾았다. 즐거워야 할 연휴 문턱이지만 머리부터 지끈거리는 이유는 지난해 추석연휴에 겪었던 악몽 때문이다. 김씨는 대체 휴일까지 나흘간 이어진 추석 연휴에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두 배나 늘어난 업무량만 고통은 아니었다. 밀려드는 주문 속에 “무조건 추석 전에 상품을 배송해 주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으름장부터 “중요한 선물을 보내야 하는데 너 때문에 일이 잘못되면 고소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에 시달리며 냉가슴을 앓아야 했다. 김씨는 “교육받은 대로 무조건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당시 느꼈던 모멸감을 좀처럼 잊을 수 없다”며 “몸이 먼저 명절의 괴로움을 알고 반응하는 것 같다”고 푸념했다.

김씨처럼 연휴 내내 고객을 응대해야 하는 감정노동자들에게 설은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직업 특성상 폭주하는 업무 속에서도 끊임없이 친절을 강요받는 노동의 굴레에 놓여 있다. 지난해 10월 한국고용정보원의 조사를 보면 15개 감정노동 직업군 중 텔레마케터(1위) 호텔관리자(2위) 항공권발권사무원(7위) 마트판매원(12위) 고객상담원(15) 등 5개 직업 종사자들이 명절 연휴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년째 서울시 120다산콜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A(33)씨도 그 중 한 명이다. A씨는 “명절에는 차가 막히지 않는 길을 빨리 알려달라고 다급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도 인터넷을 통해 도로교통자료나 홈페이지를 보고 설명하는 입장이라 업데이트가 안되면 알려주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폭언을 하는 민원전화도 다반사다. A씨는 “술에 취해 경상도 어느 부근에서 야생동물이 출몰했다며 도와달라고 떼를 쓰는 등 이성적 대화가 안 되는 민원인이 명절이면 유독 몰린다”고 하소연했다.

명절 특수를 놓치기 싫어하는 회사의 무리한 경영은 감정노동자들의 어깨를 더욱 짓누른다. 일부 호텔과 유통업체들은 ‘연휴기간엔 무례한 손님에까지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는 등의 내부 매뉴얼까지 만들어 직원들을 옥죄고 있다. 7년째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근무하는 최모(34)씨는 “연휴를 챙기지 못하는 게 호텔리어의 숙명인 건 알지만 회사 이미지 실추를 이유로 성희롱적인 행동을 일삼는 고객에게도 친절을 베풀라는 지시에 상실감이 커진다”고 토로했다.

연휴기간 며칠을 긴장 상태로 지내다 극심한 우울증과 후유증이 닥치는 일도 많다. 한 홈쇼핑업체 관계자는 “명절 연휴 이후 우울 증세를 호소하는 직원이 많아 가급적 휴가를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국가인권위원회가 1년 365일 운영되고 있는 유통업 서비스업 종사자의 건강실태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2,511명)의 73.3%는 “과중한 업무 시간 탓에 개인과 가정, 사회활동에서 갈등이 생긴다”고 답변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사회가 고도화하면서 소비자 권리는 커진 데 반해 감정노동자의 권리는 점점 억압되는 모순된 환경에 처해 있다”며 “명절 연휴 기간 매장에 홍보물을 비치하는 등 고객이 서비스 종사자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사용자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현빈기자 hbkim@hankookilbo.com

신은별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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