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 한인섭 교수, 사시 면접 탈락의 추억

2016. 1. 3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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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시 탈락 체험담
“공무원시험 ‘애국심 평가’ 사상의자유 억압 기능할것”

1981년에 사법시험 3차 면접시험을 치러갔다. 그전까지 면접에서는 어려운 질문이 나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면 된다고들 했다. 그러나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저항 잠재세력을 싹부터 도려내자는 서슬퍼런 태세였다. 면접평정 항목으로 “국가관”을 못박고, 그 첫 적용례가 81년 면접이었던 것이다.

  면접위원은 검사 1인, 교수 1인. 검사가 면접에 온 것도 전례없던 일이었다. 검사가 먼저 질문했다.

 “데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순간 진땀과 당혹감, 그래도 약간의 오기가 발동)

 “저, 시대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

 “일제하 광주학생운동 등 학생운동 있지 않습니까. 당시엔 범죄였지만 지금은 자랑스런 역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 데모가 좋다 이 말이지?”

 “(더 진땀)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 요즘 데모는 어떻게 생각하나?”

 “(덫에 걸린 상태에서 최소한의 자존심이 꿈틀). 현시점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볼 때는 확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고시했는지 잘 모르겠는데...합격하면 뭘 할 건가?”

 “무변촌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변론하고 싶습니다.”

 “그럼 판검사는 안 하겠다는 거지”

 “(이런 답변도 왜 꼬지?)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몇년 간은 판사로서 실무경험을 쌓을 생각도 있습니다.”

 “검사는 끝끝내 안 하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무려 15분이었다. 면접을 마치고 나니 골이 깨지듯 아팠다. ‘이게 고문이구나, 취약한 수험생을 심리적 칠성판 위에 올려놓고 갖고 노는구나’ 이런 느낌. 예상대로 불합격판정을 받았다. 나같이 불합격한 수험생은 10여명.

달리 답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실제로 다음 사시에서 “데모는 나쁩니다”고 처음부터 납작 엎드린 수험생도 있었는데, “이 자리 말고 다른 데서도 똑같이 답변할 건가?”라는 핀잔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물론 불합격이었다. 그 시대가 그러했기에.

 후일 과거사위원회에서 정밀조사를 거쳐 확인된 사실은, 당시 불합격예정자의 명단이 사전통보되었고 면접위원들의 재량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 확인 사실에 터잡아 2008년에 법무부장관은 불합격처분을 직권 취소했다. 나같은 불합격자들은 다시 면접시험을 치러 합격증을 받았다. 당시 ‘국가관’ 불량으로 불합격했는데 27년 후에는 내 국가관이 문제없다고 하니, 변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국가의 모습이다.

이 기억을 왜 새삼 불러내는가. 앞으로 모든 공무원시험에서 ‘애국심’을 평가기준으로 포함시킨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인사혁신처의 원안에 포함된 ‘민주성, 공익성, 다양성’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 ‘애국심’을 슬그머니 끼워넣은 것이다.

 비애국적 공무원을 걸러내자는 게 왜 이상하냐고 반문할 법하다. 그러나 애국심을 빌미로 특정 정권이 선호하는 국가관을 주입하고, 자유로운 생각을 억압하는 장치로 악용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애국가 4절 외우기로, 국기 들고 거리행진 따위로 애국심을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애국심은 악당의 마지막 도피처”라는 새뮤얼 존슨의 말씀이 의미하듯이, 애국을 소리높여 외치는 사람 중에 진짜 애국자는 별로 없다.

국가숭배를 애국으로 착각하는 건 파시즘, 군국주의, 전체주의의 잔재일 뿐이다. 국가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진정한 애국이란 국가숭배가 아니라 국민사랑이다.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마음이다”(홍승희). 애국이란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서약을 외우는 게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네크라소프). 참된 애국이란 반민주적 시도에 대해 저항하는 용기이고, 어려운 이웃을 향한 연민의 눈물이고, 물에 빠진 아이들을 향한 헌신의 몸짓이다. 대통령의 잔여 임기도 자꾸 줄어드는데, ‘애국심’을 빌미로 정권충성분자와 순응주의자만 골라내겠다는 그런 발상은 그만두는 게 마땅할 터이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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