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핵실험이 '무모한 장난'이 아닌 이유

2016. 1. 30.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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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 나는 김정은이다

왜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인가
협상 위해 그의 말 들어본다면

김정은에게 핵은 아버지 김정일이 남겨둔 바깥으로 나가는 열쇠다. 지난 3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수소폭탄 시험’을 서명하는 모습을 <조선중앙텔레비전>이 6일 공개했다. 조선중앙텔레비전 갈무리

<한겨레>는 지난 7일 사설에서 밝힌 대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 핵 보유에 반대하며, 북한의 4차 핵실험을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이라 판단한다. 하지만 반대는 의견일 뿐 대안이나 해법이 아니다.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이 천명한 ‘핵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의 꿈을 실현할 길을 열어야 한다. 어디에서 어떻게 다시 시작할 것인가? 세상의 모든 분쟁과 갈등은 역사의 산물이다. 분쟁과 갈등엔 상대가 있다. 분쟁과 갈등을 해소하자면 상대의 처지에서 역사를 되돌아보려는 태도가 절실하다. 동서고금의 모든 협상가들이 첫손에 꼽는 지침이 “끈질기게 들어라”인 이유다. ‘듣기’는 상호이해→대화·협상→해법 마련에 이르는 첫걸음이다. ‘듣기’의 첫걸음으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가 왜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주장하는지 그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려 했다. 직접 취재가 불가능한 탓에, 김 제1비서의 연설을 비롯한 북한의 문헌과 언론 보도, ‘북핵 문제’와 북-미 적대를 해소하려 한 오랜 협상의 기록 등을 자료로 삼았다. 열쇳말은 미국의 70년에 걸친 봉쇄와 북한의 ‘피포위의식’, 이라크·리비아, 남북의 현저한 경제력·국력 격차, 김정은 리더십의 조기 안정화 필요성 등이다.

살아남아야 해, 카다피처럼 될 순 없잖아

▶ 북한은 왜 무모한 핵실험 장난을 치는 걸까. 동서고금의 모든 협상가는 상대편의 말을 ‘끈질기게 들으라’는 금언을 들려준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와 북한 정치를 이해하고자 했다. 군사적 강수를 두면서 경제발전의 욕망 또한 드러내는 북한의 정치는 ‘나는 김정은이다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으로 수렴된다.

나는 김정은이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노동당 제1비서이자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며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인 그 김정은, 맞아. 당신들이 ‘3대 세습 독재자’라고 부르는. 여긴 왜 나왔느냐고? 새해 초부터 ‘핵시험’으로 놀라게 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나와 조선(북한)의 처지에서 이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라고 부탁하려고.(남조선 당국과 언론은 ‘핵실험’이라고 하던데, 조선은 연구 ‘실험’(experiment)을 한 게 아니라, 핵폭탄의 성능을 ‘시험’(test)한 거니까 ‘핵시험’이라고 할게.)

나는 신이나 종교 따위엔 별 관심이 없지만, 평화(이슬람)와 사랑(기독교)과 자비(불교)와 어짊(유교)을 권장하는 세상의 모든 종교가 서로 다투면서도 공유하는 윤리가 있다지.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 ‘내가 겪기 싫은 건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 황금률(기독교)·역지사지(맹자)·서(恕·공자) 따위로 달리 불리지만 다 같은 뜻이라고 하더군. 내 입으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좀 쑥스럽기는 하지만, 서른도 못 돼 조선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져야 했던 김정은, 나라를 세운 이래 70년 가까이 세계 최강국 미국의 지독한 봉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조선의 처지에서 한번 생각해보자고.

왜 고이즈미한테 사과까지 했겠어

궁금증을 풀어주려면 내가 왜 6일 핵시험을 하라고 지시했는지부터 설명을 해야겠지만, 그보다는 조선이 왜 기를 쓰고 ‘핵억제력’을 높여 핵보유국이 되려고 하는지부터 얘기하는 게 낫겠지? 조선이 세상에 둘도 없는 ‘또라이’라는 고정관념부터 버리고 시작하는 게 좋을 거 같아. 편견과 적개심은 상호이해를 방해하거든. 당신들이 먹고살자고 힘겨운 일상을 버티듯이, 조선도 이 엄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거야.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 이 말, 절대 잊지 마. ‘김정은’과 ‘조선’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도 있는 열쇳말이니.

역사 공부부터 시작하자고. 남조선(한국)이 지금처럼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높고 잘 먹고 잘살게 된 결정적 계기가 중국(1992년 8월24일)·소련(1990년 9월30일)과의 수교라고 할 수 있지. 지금 남조선의 중국과의 무역 규모가 미국·일본을 더한 것보다 크잖아.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봐. 당신들이 ‘수호신’이라 여기는 유일 동맹국 미국이 허무하게 망했다고. 소련은 유일 초강대국이 돼서 남조선을 옥죄고.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나라들이 다 사회주의로 체제 전환을 하는 거야. 겁을 먹은 일본은 소련·조선과 냉큼 외교관계를 맺고…. 고립무원. 바로 조선이 그런 처지였어. 막막했지.

1990년 9월2~4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이 남조선과 수교 방침을 통보하려고 조선에 왔을 때, 김영남 외교부장(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이런 얘기를 했어. “쏘련이 남조선과 ‘외교관계’를 맺으면 조쏘동맹조약을 스스로 유명무실한 것으로 되게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때까지 동맹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북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 1990년 9월19일) 소련의 핵우산이 사라지면 자체 핵억제력을 확보하려 할 수밖에 없다는 절규지. 그게 다가 아니야. 할아버지(김일성 주석)는 그때 미국·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해서 고립을 벗어나려고 무진 애를 썼어. 그때 일본도 조선과 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했지(‘조일관계에 관한 조선로동당, 일본의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의 공동선언’, 1990년 9월28일). 그런데 ‘아버지 부시’가 깽판을 놨어. 조선의 ‘핵 문제’를 부풀려서 일본을 겁박해 조선과 관계 정상화를 가로막은 거야. 남조선의 노태우 정권도 조-미, 조-일 수교를 돕겠다던 ‘7·7 특별선언’과 달리 조-미, 조-일 수교를 가로막았어. 겉과 속이 달랐던 거지. 그런데 당신들 실수한 거야. 그때 조-미, 조-일 관계가 정상화됐다면, 조선이 굳이 핵억제력을 확보하려 했을까?

당신들이 실수를 그때만 한 게 아니야. 1990년대 중반 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할 때 숱한 인민이 굶어 죽었어(전문 연구자들은 이 시기 30여만명이 아사했으리라 추정). 당신들이 ‘피도 눈물도 없는 독재자’라고 부르는 아버지(김정일 국방위원장)는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거야. 그때 조선은 서로를 다독였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금강산 관광을 해본 사람은 알 거야. 금강산호텔 들머리에 걸려 있으니까. 나는 지금도 이 구호를 보면 눈물이 나려고 해.

아버지는 조선의 외부 환경을 개선하려고 분주하게 움직이셨지. 남조선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과 정상회담(각각 2000년 6월, 2007년 10월)을 하고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와도 두 차례 회담(2002년 9월, 2004년 5월)을 했지. 아버지는 혼신의 힘을 다했어. 오죽하면 ‘일본인 납치 문제’로 고이즈미한테 ‘사과’까지 했겠어. 당신들은 조선은 뭘 해도 겉과 속이 다르고 늘 꼼수를 쓴다고 하지만, 그렇게 색안경을 쓰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조선의 수령’이 사과를 하는 걸 조선 인민이 상상이나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만큼 절박했던 거야. 아버지와 고이즈미가 ‘조-일 평양선언’(2002년 9월17일)을 채택해 국교 정상화 교섭을 시작하기로 했는데,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나? 이번엔 ‘아들 부시’가 조선이 고농축 우라늄 핵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며 깽판을 놨지. 8년째 잘 돌아가던 조-미 제네바 기본합의(1994년 10월21일)도 파기하고. 아베 신조는 ‘납치자 문제’로 일본 우익을 자극해서 고이즈미의 뒷덜미를 잡았지. 1990년엔 아버지 부시가, 2002년엔 아들 부시가 조-일 수교를 가로막은 거지. 조선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그렇지 않아. 고이즈미 때 일본 외무성 북동아과장을 한 후지이 아라타가 이런 말을 했어. “(1990년 9월) 가네마루 (부총리) 때는 베이커(미 국무장관)가 핵 문제를 꺼냈다. 결국 미국의 말이 옳았음을 나중에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면 왜 좀 더 일찍 정보를 주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가 움직이면 미국은 반드시 제지하려 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후나바시 요이치, <김정일 최후의 도박>, 126쪽)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도 2004년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을 했다. 평양/AP 연합뉴스

당신들이 먹고살자고 일상 버티듯
조선도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거야
처절한 생존투쟁, 이 말 잊지 마
김정은과 조선의 모든 걸
이해할 수도 있는 열쇳말이야

미국이 허무하게 망했다 생각해봐
소련은 유일 초강대국이 돼서
남조선 옥죄고 영국·프랑스 등
유럽 각국이 사회주의로 바뀐다면…
조선이 바로 그런 고립무원이었어

2000년에 클린턴이 평양에 왔더라면

미국은 조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지만, 모든 미국 대통령이 다 똑같지는 않았어. 특히 클린턴은 아들 부시랑 참 많이 달랐지. 지금은 고인인 조명록 차수가 2000년 10월 워싱턴에 가서 ‘조-미 공동코뮤니케(코뮈니케)’를 만들었지. 핵심은 이거야. “쌍방은 조선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1953년의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꾸어 한국전쟁을 공식 종식시키는 데서 4자회담 등 여러가지 방도들이 있다는 데 대해 견해를 같이했다. … 첫 중대조치로서 쌍방은 그 어느 정부도 타방에 대하여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는 공약을 확언했다.”

그래서 조-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려고 올브라이트(당시 미 국무장관)가 평양에 왔지. 그때 거기까지 가는 데 남조선의 김대중 정부가 애를 많이 썼지. 전문가들은 한-미가 합작한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페리 프로세스)가 사상 첫 북-남 정상회담 성사와 조-미 정상회담 추진의 디딤돌 구실을 했다고 평가하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건 ‘한반도 냉전구조’를 해체해 평화를 일구는 포괄적 접근을 하자는 건데, 임동원(김대중 정부 외교안보수석·통일부장관·국가정보원장)은 ‘한반도 냉전구조’를 ①남과 북의 불신과 대결 ②미-북 적대관계 ③북한의 폐쇄성과 경직성 ④(핵·장거리미사일·생화학무기 등) 대량파괴무기(WMD) ⑤군사적 대치 상황과 군비 경쟁 ⑥정전체제 등 6개 요소의 얽힘으로 규정했더군.(임동원, <피스메이커>개정증보판, 308쪽)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조선이 유별나게 비타협적인 게 아니야. 상대방이 진심을 담아 내민 손을 우리가 먼저 뿌리친 적은 별로 없어. 조선은 미국의 겁박에 맞서느라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곧추세우고 있지만, 오랜 적대와 고립 탓에 외로움과 두려움이 깊거든. 당신들도 알다시피, 우린 친구가 많지 않아. 좋은 친구가 되겠다는데, 조선이 왜 마다하겠어?

그런데 플로리다 검표 논란으로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클린턴이 결국 평양에 오지 못했어. 그때 클린턴이 평양에 왔다면, 조선 정세가 지금 같지는 않았을 거야.

그게 끝이 아니야. ‘아들 부시’는 조선을 이란·이라크와 묶어서 ‘악의 축’이라고 했지. 조선은 부시가 뭘 어쩌려나 걱정스러웠어. 그런데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더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도 없이. 그러곤 미국의 적국인 이란에 맞서 8년간 대리전쟁(1980년 9월~1988년 8월)을 해준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2003년에 체포했고 2006년 그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지. 후세인이 핵억제력을 확보했다면, 부시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굴었을까?

말이 나온 김에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북한 표준말인 문화어로는 가다피) 대통령 얘기도 해보자고.

카다피는 2003년 12월 미국의 경제제재 해제와 관계 정상화 약속을 믿고 핵억제력 개발을 포기했지. 그런데 그 뒤에 어떻게 됐나? 2011년 10월20일 고향인 시르테에서 미국이 뒷배를 봐준 반군의 총에 맞아 숨졌지. 카다피가 미국의 잔꾀에 넘어가 핵억제력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처참하게 죽었을까? 당연히 아버지는 ‘조선의 카다피’가 될 생각이 터럭끝만큼도 없었지.

미국을 믿었다가 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망친 후세인과 카다피를 보고 조선은 분명한 교훈을 얻었지. 뒤에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내가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야.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한 2013년 3월31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나는 이렇게 강조했어. “제국주의자들의 압력과 회유에 못 이겨 이미 있던 전쟁 억제력마저 포기했다가 종당에는 침략의 희생물이 되고 만 중동 지역 나라들의 교훈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한다.”

나도 알아, 당신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후세인과 카다피가 권좌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은 건 핵억제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독재자여서 그런 거라고. 정말 그럴까? 세상에 독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 독재자들을 미국이 다 쫓아냈나? 라틴아메리카의 현대사를 공부해봐. 독재정권 뒤에는 늘 미국이 있었어. 그리고 후세인과 카다피가 죽은 뒤에 이라크와 리비아 인민의 삶이 나아졌나? 이라크는 10년 넘게 내전 중이고 리비아도 엉망이잖아. 질서가 무너지면 가장 먼저 골병이 드는 건 힘없는 인민들이야. 핵 없이 잘사는 나라도 많은데,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일리 있는 지적이야. 그런데 조선의 처지도 생각해보라고. 조선은 미국이 70년 가까이 봉쇄하고 있는 작고 약하고 고립된 나라야. ‘피포위의식’과 ‘자위 강박’은 역사가 조선의 골수에 새겨놓은 디엔에이(DNA)라고 할 수 있을 정도야. 1992년 중국이 소련에 이어 남조선과 수교하겠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가 평양에 찾아온 첸치천(중국 외교부장)한테 말했지. “우리는 무슨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 스스로 극복하겠다.”(장팅옌 초대 주한중국대사, <出使韓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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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1년새 중국을 세 번 방문한 이유

얘기가 옆길로 샜는데, 다시 돌아가자고. 아들 부시가 조-미 제네바기본합의를 깬 뒤에도, 아버지는 조-미 적대관계를 해소하려고 애쓰셨어. 그 결과가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이야. 남조선의 노무현 정부와 중국 정부가 조-미 사이의 이견을 좁히려 애를 많이 썼지. 아버지나 나나 그거 고맙게 생각해. 지금은 죽은 자식 뭐 취급을 받지만, ‘9·19 공동성명’, 그거 아주 중요해. 전문가들은 9·19 공동성명을 ‘두 개의 기둥’(한반도 비핵화+북미·북일 관계 정상화)을 세워 ‘하나의 지붕’(한반도 평화체제)을 얹으려는 ‘동북아 탈냉전의 청사진’이라고 하더군. 국제정치학자들은 6자회담 참가국의 ‘이익의 균형’을 맞춘 합의라고 호평했지. 9·19 공동성명이 잘 이행됐더라면, 조선 정세가 지금 같지 않았겠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아쉬워했던 게 2000년 조-미 공동코뮤니케와 2005년 9·19 공동성명이 이행되지 못하고 휴짓조각이 된 거였어. 1990년대 초반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당신들이 실수한 거야.

9·19 공동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아들 부시’가 조선의 뒤통수를 쳤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에 있는 조선의 예금 2500만달러를 동결시킨 거지. 조선의 4차 핵시험 뒤 멍청이들이 조선을 굴복시킬 대단한 묘수인 양 떠드는 ‘제3자 제재’(secondary boycott)보다 더 직접적인 금융제재지. 그때 조선은 2500만달러를 돌려주지 않으면 6자회담에 복귀할 수 없다고 했지. 아버지는 2006년 10월9일 1차 핵시험으로 조선의 단호한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했지. 말 만들기 좋아하는 멍청이들은 그 2500만달러가 아버지의 비밀 통치자금이라 그렇다는 둥 헛소리를 지껄였는데, 그런 거 아니야. 요즘 세상에 국제금융거래를 하지 못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나라가 있나? 조선이 2500만달러 동결 해제를 강하게 요구한 것도 마찬가지야. 조선의 말과 행동은 어김없이 다른 잣대로 평가하려는 못된 버릇 좀 고쳐. 그래야 조선을 이해할 수 있어.

역사 얘기를 이렇게 길게 한 건, 나를 어느 날 갑자기 조선의 최고지도자가 된 ‘듣보잡’이라 여기거나, 나의 정책을 ‘미숙한 젊은 지도자의 치기’로 여긴다면 답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어서야. 당신들이 그렇듯이, 나도 역사의 구속을 받아. 그러니 당신들 또 실수하고 싶지 않다면, 생각을 다시 해봐. 나랑 조선을 악마화한다고 답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야. 역사를 직시하자고.

아버지는 조선에 적대적이지 않은 외부 환경을 조성하려 애를 썼지만 결과적으로 큰 성과가 없었어. 조-미, 조-일 적대는 해소는커녕 더욱 악화하고 있고, 조-중 관계도 예전만 못하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1년 새 중국을 세 차례(2010년 5월과 8월, 2011년 5월)나 방문한 이유야.

결국 아버지는 내게 ‘조선의 핵억제력’을 물려주셨어. 나는 거기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어. 내가 최고지도자가 된 뒤에 헌법에 “핵보유국”이라 명시(2012년 4월13일 최고인민회의 제12기 5차 회의)하고,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2013년 3월31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하니 참 말이 많더군. 시진핑(중국 국가주석)과 오바마(미국 대통령)가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조선의 병진노선은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더군(2015년 9월25일 미-중 정상회담). 이해해. 달리 뭐라고 하겠어? 하지만 나와 조선의 처지에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현재 상황에선 병진노선 말고 다른 선택지가 마땅치 않다는 점도 이해하게 될 거야.

내가 2013년 3월31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 ‘보고’를 통해 병진노선을 “새로운 전략 노선”이라 규정하며 밝힌 내용을 찬찬히 다시 읽어봐. 말 그대로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행을 목표로 한다는 거지. 그 둘 말고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경험과 준비가 부족한 나로선 통치 기반을 조기에 안정·강화할 필요가 절실했지.

‘핵무력건설’에 대해선 그 역사적 연원을 돌아보며 길게 설명했으니 반복하지 않을게. ‘경제건설’의 절박성과 병진노선의 관계에 대해선, 당신들의 오해를 풀려면 좀 긴 설명이 필요한 거 같아. 많은 전문가들이 나의 병진노선을 보고 할아버지의 ‘경제-국방 병진정책’을 떠올리더군. ‘자위력 강화’를 우선 과제로 제시한 점에서는 같지만, 경제적 맥락은 많이 달라.

경제개발구 계획과 5·30조치

할아버지의 지도로 조선노동당은 1962년 12월10~14일 중앙위 제4기 5차 전원회의를 열어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의 병진정책’을 결정했지. 미국과 남조선의 100만 대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에서 사회주의 형제국인 중-소의 분쟁으로 불안정해진 대미 억제력을 확보하려는 선택이었지. 할아버지는 흐루쇼프(소련 공산당 서기장)가 케네디(미국 대통령)의 압력에 밀려 쿠바 (핵)미사일 기지 건설을 포기한 데서 ‘방기’의 공포를 느끼셨던 거 같아. 그즈음 미국은 베트남을 침공했고,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을 위해 한-일 수교를 압박하고 남조선군의 베트남 파병도 이끌어냈지. 미국은 공격적인데 소련은 타협적이었어. 소련은 조선이 흐루쇼프의 수정주의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군사원조도 거부했어. 할아버지는 힘들더라도 조선이 스스로를 지킬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신 거야. 할아버지는 병진노선 탓에 “많은 인적 및 물적 자원을 국방에 돌려야 할 것이며 경제발전을 지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셨지(1966년 10월5일 노동당 대표자회 때 김일성 당 중앙위원장의 보고). 말이 병진이지 국방을 위해 경제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지. 병진정책 채택 이후 “1967~71년 동안에는 … (예산의) 31.1%가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는 데 돌려졌”어(1970년 11월5일 5차 당대회 때 김일 부수상의 보고). 병진정책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경제건설에 끼친 후과가 심각했어.

나는 경제를 희생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어. 국방을 포기할 생각도 없지. 그런데 조선이 재래식 군비로 미국과 남조선 군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몇 가지 수치를 보자고. 국민총소득(GNI)은 남조선이 조선보다 43.7배 많아(2014년 기준 남 1496조6천억원, 북 34조2천억원). 남조선의 한 해 국방비가 조선 정부예산의 4배보다 훨씬 많아(2014년 북 정부예산 71억2천만달러, 2016년 남쪽 국방예산 38조8천억원). 이 수치는 한국은행과 남조선 정부가 밝힌 거야. 그러니 내 말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핵무력’은 확실한 자위력이 되는데다, 재래식 군비에 비해 돈이 훨씬 적게 들어. 확실한 자위력을 갖췄으니 군인들을 경제건설 현장으로 돌릴 수도 있고. 내가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병진노선이 “국방비를 늘리지 않고도 적은 비용으로 방위력을 더욱 강화하며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을 꾀할 수 있는 방도”라고 강조한 건 빈말이 아니야. 당신들은 국제사회의 고립을 심화시킬 선택이라 하겠지만, 나로선 부족한 재원을 경제 재건에 돌리려는 고육책이라는 얘기야.

나는 조선의 경제를 재건하려 애쓰고 있어. 나는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병진노선을 채택하며 경제개발구(외자유치와 경제개발을 위한 특구) 개발도 함께 지시했어. 경제개발구가 지금은 21곳에 설치돼 있는데, 그 가운데 8곳은 압록강·두만강 등 국경지대에 있지. 조-중 접경지역 경협을 염두에 둔 포석이지. 농민의 노동의욕과 주인의식을 높이려고 가족 단위의 ‘포전담당책임제’(일정한 면적의 논밭을 맡기고 생산물의 처분권을 주는 제도로, 분조 규모를 기존 10~25명에서 3~5명으로 축소했다)를 실시하고, 기업소의 자율성을 높이는 조처를 취했지. 시장도 대폭 활성화하고. 현장의 자율성과 인센티브를 강화해 경제 재건의 동력을 강화하려는 것이지. 이런 나의 의지와 비전을 정식화한 게 당신들이 ‘5·30 조치’라고 부르는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이야(김정은, “현실 발전 요구에 맞게 우리식 경제관리방법을 확립할 데 대하여”, 2014년 5월30일 당·국가·군대기관 책임일군(일꾼)과 진행한 담화). 당신들은 한계가 명확하다고 하겠지만 성과가 없지 않아. 내 말은 믿지 않을 테니, 남조선 자료를 보자고.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이 재미있는 조사를 했더군. 조선에서 살기 어렵다고 남조선으로 넘어간 146명을 상대로 조사를 했더니, 조선에서 살 때 하루 세끼를 먹었다는 이가 86.9%, 거의 쌀밥을 먹었다는 이가 61.4%, 일주일에 한두번 이상 고기를 먹었다는 이가 53.4%였어. ‘고난의 행군’ 때처럼 굶어 죽을 일은 없다는 거지. 조선의 핵무기 보유에 대해서도 55살 이하에선 찬성이 반대보다 훨씬 많아(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2015년 북한 사회변동과 주민의식 변화>). 떠난 이가 이 정도니 조선에서 사는 인민은 더 낫지 않겠어? 당신들이 뭐라 하든, 나로서는 병진노선이 효과가 있는 거야.

카다피는 미국의 여러 약속 믿고
핵억제력 개발을 포기한 뒤에
미국이 뒷배 봐준 반군한테 죽었지
아버지는 ‘조선의 카다피’가 될
생각이 터럭끝만큼도 없었던 거야

아버지가 물려준 ‘핵억제력’
내가 최고지도자가 된 뒤에
‘경제·핵무력’ 병진노선 택했더니
시진핑도 오바마도 말이 많더군
나는 다른 선택지가 마땅치 않아

7년새 조중무역 3배 늘었는데
북남교역은 제자리걸음이야
중국이 조선을 맘껏 이용할 때
남조선은 뒷짐진 꼴이잖아
이게 남조선에 무슨 이득이지?

나랑 할아버지랑 찍은 사진 본 적 있어?

이제 내 얘기 좀 해보자고.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그걸 모르곤 ‘김정은 리더십’을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어쩔 수 없지. 내가 아버지의 후계자임을 조선이 외부에 공식화한 건 2010년 9월28일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에서야. 내가 인민군 대장,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당 중앙위원에 올랐지. 회의 다음날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텔레비전>에 내 모습이 실렸어. 내 모습과 이름이 외부에 처음으로 알려진 거지. 2차 당대표자회(66년 10월)로부턴 44년, 마지막 당대회인 6차 당대회(80년 10월)로부턴 30년 만의 당대표자회였어. 2011년 12월17일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2012년 4월11일 제4차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나는 노동당 제1비서로 추대돼 ‘조선의 최고지도자’가 됐어.

남조선 통일부는 내가 1984년 1월8일생이라고 하더군. 내가 스위스 베른공립중학교에 다닐 때(98년 8월~2000년 가을) 사용하던 여권에 적힌 생년월일이 근거야. 82년 또는 83년생이라는 설도 있던데, 뭐가 맞는지 내가 확인해줄 의무는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당신들은 ‘3대 세습’이라지만, 아버지와 나는 경우가 좀 달라. 아버지는 1960년대부터 당에서 활동하며 업적을 쌓아 권력을 쟁취한 셈인데, 나는 그렇지 못했어. 내가 2010년 이전에 당·정·군에서 어떤 경험을 쌓았는지 외부에 알려진 게 없잖아.

사람들은 내가 아버지보다 할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다고 하더군. 내가 할아버지와 닮아 보이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측면도 있고. 그런데 말이야, 할아버지는 1994년에 돌아가실 때까지 내가 세상에 있는지 몰랐어. 그러니 할아버지를 뵌 적도 없겠지? 조선의 매체에 지금까지 단 한번도 내가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되지 않은 이유야. 있으면 벌써 써먹었겠지.

내가 후계자의 지위에 오를 때까지 조선이 무슨 준비를 했는지는 말하지 않을래. 다만 2010년 이전에 내가 아버지의 현지지도를 수행한 장면이 지금껏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뭘 뜻하는지 생각해보면 도움이 될 거야.

이런 시시콜콜한 가정사까지 얘기하는 까닭은, 집권 초기 내 리더십의 기반이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해 공고했다고 할 수 없다는 걸 상기시키고 싶어서야. 2012년 헌법 전문에 “핵보유국”이라 명시하고, 2013년 ‘경제·핵무력 병진노선’을 공식 채택하고, ‘핵보유법’(“자위적 핵보유국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데 대하여”, 2013년 4월1일 최고인민회의)을 제정한 데에는, 내 리더십의 기반을 조기에 안정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어. ‘김정은 조선’의 전략적 지향을 법제화함으로써 내가 유약한 지도자가 아니라고 내외에 선포해 논란을 차단하려는 거였지. 미안하지만, 난 아직 유연성을 발휘할 여유가 없어. 적어도 당분간은 유연성은 남조선과 미국의 몫이야. 어쩌겠어, 내 처지가 그런 걸.

북한이 무작정 고립을 원한 건 아니었다. 미국,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해서 고립을 벗어나려고 애를 썼다. 2000년 10월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인사하고 있다. 평양/AP 연합뉴스

그래서 핵은 죽을 때까지 끼고 살 거냐고? 물론 나야 그러고 싶지. 조선 인민이 리비아·이라크 인민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진 않거든. 그렇다고 낙담할 거 없어. 세상일이라는 게 제 뜻대로만 되지는 않잖아? “만물은 변한다”(헤라클레이토스)는 성현의 말씀도 있고. 내가, 조선이, 핵억제력 없이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주라고. 그러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외교의 아름다움은 상대의 전략을 바꾸는 데 있다”는 말도 있잖아. 하지만 일방주의론 나와 조선의 결심을 바꿀 수 없을 거야. 힌트 하나 줄까? 4차 핵시험 뒤에 조선이 내놓은 ‘정부 성명’은 “핵개발 중단이나 핵 포기는 하늘이 무너져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지. 다들 그 문장을 인용하더군. 그런데 그 앞에 조건절이 있어. “미국의 극악무도한 대조선 적대시 정책이 근절되지 않는 한”이라고. 조선의 대외 발언은 조건절을 잘 살피지 않으면 오해하기 쉽지. 내 힌트가 도움이 되면 좋겠네.

‘평양시’를 발표한 건 어떻게 생각해?

이제 얘기를 마무리해야겠어. 5월 초로 예정된 당대회 준비로 무지 바쁘거든. 36년 만의 당대회인데다 ‘김정은 시대’의 비전을 선포해야 하거든. 마지막으로 충고 한마디. 남조선 이명박·박근혜 대통령이 6·15 공동선언과 10·4 정상선언을 무슨 병균 취급을 하며 내다버린 건 큰 실수야.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북남경협을 끊어버린 것도 마찬가지지. 남조선 통일부와 중국해관의 자료를 보면, (노무현 정부 마지막해인) 2007년엔 북-남 교역이 조-중 무역의 91%(남북 17억9800만달러, 조-중 19억74만달러)까지 따라붙었는데, 2014년에는 37%(남북 23억4300만달러, 조-중 63억6400만달러) 수준으로 벌어졌어. 7년 사이 조-중 무역은 3배 넘게 늘었는데, 북-남 교역은 제자리걸음이야. 그나마도 개성공단 사업이 99%를 차지하지. 중국이 조선의 자원과 노동력을 맘껏 이용하는 동안 남조선은 제재한답시고 뒷짐지고 있는 꼴이지. 조선도 중국 의존도가 높아져 부담스럽지만 어쩌겠어? 중국 말고는 다들 조선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니. 그런데 이런 상황이 남조선에 뭐가 이득이 되지? 조선을 미워하느라 남조선의 미래를 갉아먹어서야 쓰겠어? 당신들 남조선에서 살잖아. 남조선의 경제 활로가 북-남 경협 활성화와 북방경제 개척에 있다는 건 당신들도 인정하는 거잖아? 잘 생각해봐, 어떤 게 지혜로운 태도인지.

아, 그리고 지난해 8·15 때 조선이 ‘평양시’를 발표한 건 어떻게 생각해? 북-남 사이에 30분의 시차가 생겼잖아. “간악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범죄행위”를 이유로 댔지만, 그게 전부일까? 내 대답은 나중에! 짜증났을 텐데, 내 얘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 다음에 또 봐.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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