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끝뉴스] 악몽의 제주휴가, 몸은 방전됐어도 행복은 충전됐다

김형준 2016. 1. 26.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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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제주국제공항은 여전히 복잡했습니다. 그곳 상황을 지인들께 사진으로 전하니 ‘어제 보낸 사진 또 보내는 것 아니냐’는 농담도 돌아옵니다. 지인들의 걱정도 줄어든 것 같아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이날 오후 1시 50분 지연출발 된 이스타 항공을 이용해 조금 전 김포공항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지난 19일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으니 제주도에서 정확히 일주일을 꽉 채우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당초 김포행 비행기에 오르려 했던 23일 상황을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옵니다. 결항도 결항이지만 상상도 못했던 눈보라에 공항을 빠져 나갈 엄두도 나지 않아 잠시 넋을 놓기도 했고, 오늘까지 겪은 ‘고립 속 기다림’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뇌리에 펼쳐집니다. (관련기사 ▶ 휴가가 출장으로…제주공항 50시간 사투기(http://hankookilbo.com/v/7240608d688e44f2960c81cd0886645e))

하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항공기 안에서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진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원봉사자들의 사진이 참 많았습니다. 몇 날을 마주했던 이들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 하나 없었습니다.

23일 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한 생수를 나르는 봉사자들. 제주=김형준기자

고립 사태 첫날 밤의 한 장면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거센 눈보라를 뚫고 대형 트럭 한 대가 공항 입구에 들어섰고, 지체 없이 여럿이 달려 들어 생수들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는 거냐” 물으니 “드릴 거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그 생수들은 곧장 카트에 실려 체류객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사람 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날의 기상 상황을 감안하면 참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각자의 만족도는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시각 그 날씨에 기꺼이 운전대를 잡은 기사님부터, ‘눈사람’이 돼 가면서도 그 생수들을 올리고 내린 분들은 마치 슈퍼맨 같았습니다.

24일 저녁 제주국제공항에 이불이 도착했다. 제주=김형준기자

제주 고립 이틀째인 24일 찾은 제주공항엔 밤사이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들에 우선적으로 모포가 지급됐습니다. 체류객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생수는 넉넉히 확보됐고, 새벽부터 빵과 귤 등 식품들도 배급됐습니다. 이 또한 밤사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한 통신사의 발 빠른 콘센트 지원도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이곳 관계자에게 “고맙다. 생각을 잘 하신 것 같다”고 전하니 “이게 가장 필요하다고 들어 부랴부랴 준비해 나왔다”고 답했습니다. 행복이 충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해가 지자 이불이 도착했습니다. 이것도 누가 보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래도 어제보단 더 낫겠구나’하는 생각에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도 조금은 가벼워졌습니다.

항공기 결항 사흘째인 25일 새벽 한 통신사 직원들이 제주국제공항 발이 묶인 관광객들의 휴대폰 충전을 돕고 있다. 제주=김형준기자

결항 사태 사흘째인 25일. 계속된 취재로 스스로도 지쳐있던 상태였지만, 공항에서 이틀 밤을 지샌 많은 사람들의 먹거리부터 위생, 건강상태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를 누군가가 읽은 듯 공항 바닥엔 대형 매트와 스티로폼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준비가 하루만 빨랐다면 더 좋았겠지만 상당히 많은 수량의 매트와 스티로폼을 밤새 조달한 이들의 노력이 느껴졌습니다.

날이 밝자 간식과 물티슈를 나눠준 도내 자원봉사센터는 물론 GS25, 제주은행 등 민간의 도움이 줄을 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의료봉사였습니다. 제주보건소와 에스-중앙병원의 부스가 차려지자 이틀간 이런저런 고통을 참았던 체류객들이 줄을 늘어섰습니다. 조금 흥미로웠던 건, 이날 ‘오늘 오후 비행기가 뜬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부턴 진료대기 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겁니다. 어쩌면 의료봉사자들은 신체뿐만 아니라, 초조하고 불안한 이들의 마음의 병까지 치유해 준 건 아니었을까요.

제주 시민들께도 체류객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하단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특히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무료 숙박을 지원하겠단 뜻을 전해주신 분들의 인심은 가슴 한구석에 꼭 새겨두고 살아가겠습니다.

23일 폭설이 내린 제주 시내 도로의 모습. 제주=김형준기자

숙박업소 주인과 택시 운전기사가 체류객들에 바가지를 씌웠다는 소식은 몹시 가슴 아팠습니다. 적어도 제가 겪은 바로는 고마운 분들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살다 살다 이런 눈은 처음 본다”던 한 택시기사는 “많은 택시들이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지만 젊은 기사들 사이에선 ‘우리들이라도 움직여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와 차를 끌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제가 주로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역시 사람이 몰릴 것이 뻔한 데도 모든 투숙객에게 1,000원짜리 한 장도 더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힘겨웠던 3박 4일 고립 생활을 견디는 데 큰 힘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감동 받았던 건 그 과정 속에서도 요란한 생색내기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23일부터 수만 명의 승객이 머물거나 거쳐간 제주공항에서 큰 사건사고가 벌어지지 않은 데는 제주의 온정도 큰 몫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힘겨웠던 시간 속에 느낀 따뜻함 잊지 않겠습니다. 다음엔 ‘날 좋은 날, 멋지게’다시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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