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의 낭만 대신 백범의 절박함 절감

상하이·항저우 | 글·사진 심진용 기자 2016. 1. 24.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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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임시정부 고난의 길 탐방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최근 다시 주목을 끌었다. 역사교과서가 국정화될 경우 ‘뉴라이트 역사관’에 경도되어 임시정부의 정통성이 훼손되지 않을까 해서다.

위급할 때 운하로 피신할 수 있는 중국 자싱의 김구 선생 숙소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杭州), 난징(南京), 충칭(重慶) 등 곳곳에는 지금도 임시정부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일제의 폭압에 맞선 임시정부 요인들의 길고도 고단하기 그지없었던 독립운동 자취들이 때로는 생생하면서 확연하게 다가오고, 때로는 아스라이 느껴진다.

지난 10일 오후, 잔뜩 흐린 날씨 속에 ‘국민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루트 탐방단’을 태운 버스가 상하이 중심가의 한 도로에 섰다. 임시정부 기념관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하이 임정청사 기념관을 방문하기 위해서다. 상하이 임정청사 기념관은 한·중 수교 이듬해인 1993년 원형 복원됐다. 상하이를 찾는 한국인들의 대다수가 들르는 명소로 한 해에 30만명 이상이 찾는다. 좁은 골목길의 허름한 주택 건물들과 뒤섞인 기념관은 허름한 풍경 때문에 오히려 당시 임정의 분위기를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

민간주택들 사이의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기념관을 둘러본 국민대 학생 탐방단과 일반 관람객들이 기념관을 나서고 있다.

상하이 임정 시절은 1919년 4월부터 일제의 추적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는 1932년 4월까지다. 상하이 임정 시절은 재정적으로 극히 어려웠던 때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상하이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조석이 어려워서 어머니가 중국인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배추 떡잎을 뒤져다가 겨우 반찬을 만드시던 때’라고. 탐방에 동행한 장석흥 국민대 국사학과 교수는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기념관을 마주한 건물들을 가리키며 “김구 선생 어머님이 배춧잎을 뒤졌다는 데가 바로 저런 집들”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사용하던 회의실과 주방, 침실 등을 재현해 놓은 기념관에 들어서자 1층 로비 한쪽 벽에 빼곡히 걸린 액자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이곳을 방문한 한국 여야 정치인들의 기념사진이다. 정치인들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떠올랐다. 이곳을 찾아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던 그들의 일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적극 지지했기 때문이다.

10여년에 걸친 상하이 임정 생활은 1932년 막을 내린다. 그 해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일제의 추적이 한층 더 집요해진 탓이다. 사건이 일어난 훙커우 공원은 지금 ‘루쉰 공원’으로 불린다.

항저우 임정

임정은 훙커우 의거 이후 항저우부터 자싱(嘉興), 난징, 창사(長沙), 광저우(廣州)를 거쳐 충칭에 이르기까지 13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장 교수는 항저우 시절을 가리켜 “임정이 문을 닫아야 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던 시기”라며 “김구 선생을 비롯해 대부분의 인사들도 일제 감시를 피해 임정을 떠나 있었던 시기였다”고 했다. 주요 인사들이 피해 있을 때 항저우 임정은 누가, 어떻게 꾸렸을까. 기억해야 할 이들이 차리석, 송병조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이 항저우 시절 임정을 필사적으로 사수했기에 임정은 광복 때까지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차리석은 1945년 충칭 임정에서 광복을 맞이하고도 바로 다음달인 9월에 별세, 결국 한국 땅을 밟지 못했다. 차리석의 외아들에게 ‘천복’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김구 선생은 1948년 차리석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왔다.

저장성(浙江省) 자싱을 거쳐 항저우의 명승지 시후(西湖) 가까이에 있는 항저우 임정 기념관을 찾았다. 2007년 중국이 청사를 복원, 기념관으로 문을 열었다. 2014년에는 중국 국무원이 이곳을 ‘제1차 국가급 항일전쟁 기념 시설·유적’으로 지정했다. 장 교수는 “한국에서 임시정부 하면 상하이나 충칭만 생각하지 항저우는 잘 모른다”며 “가장 어려웠던 시절의 항저우 임정을 중국이 국가문화재로 지정했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했다. 차리석 등이 항저우 임정을 지킬 때 김구 선생을 비롯한 요인들은 자싱에서 피난생활을 했다. 자싱시 ‘메이완(梅灣)가 76호’가 당시 김구 선생이 머문 곳이다. 건물 정문은 일반 도로에 접해 있지만,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운하로 이어진다. 위급상황 시 바로 나룻배로 탈출하기 위한 구조다. 영화 <암살>에서는 김원봉이 나룻배를 타고 와 김구 선생을 찾는 장면이 나온다.

국민대 학생들이 주축이 된 탐방단은 6박7일간 임시정부 루트와 더불어 국내 주요 기업들의 현지 공장도 견학했다. 국민대 경영대학에서 기획해 국사학과와 함께 치르고 있는 이 탐방은 올해로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임정의 흔적들을 둘러본 대학생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추상적으로만, 어렴풋하게만 느껴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의미, 조국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가들의 생활이 비로소 실감난다.”

<상하이·항저우 | 글·사진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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