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 갚기도 전에 또 빚..1988의 '3저 호황' 응답할 길이 없다
[경향신문] ㆍ꼭 닮은 ‘저금리·저유가’…그런데 지금은 왜 불황인가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은 ‘3저(低) 호황기’를 배경으로 한다. 드라마 속 천재 바둑소년 최택이 상금으로 거액을 손에 쥐자 가족이 이를 은행에 넣을까, 땅을 살까, 아파트를 살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는 한 해 동안 주가가 70% 넘게 뛰고, 낮은 금리와 정부의 주택경기 부양책으로 아파트 불패 신화가 만들어지던 때였다.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의 이른바 ‘3저 효과’가 만들어낸 유례없는 호황이었다.
2016년 1월의 경제 여건을 보면 달러화 강세를 빼고는 30여년 전과 비슷하다. 1985~1986년 국제유가는 배럴당 28달러에서 14달러로 반 토막이 났다. 2014년 중반 배럴당 110달러 선이던 국제유가는 올 1월 30달러 선이 무너지며 70%나 폭락했다. 제2차 오일쇼크 이후 침체에 빠진 경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1985년 미국은 달러화 가치를 절하했고, 이 과정에서 금리도 낮아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역시 미국은 경기 부양을 위해 기준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금리도 낮고 원유 값도 싼 비슷한 여건임에도 지금은 호황은커녕 암울한 전망만 드리운다. 어떻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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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만 해도 3저 현상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특징과 잘 맞아떨어졌다. 수출 의존 성장을 구가해온 한국 경제에 저유가와 저금리는 ‘단비’였다. 1985년 플라자합의(선진 5개국 재무장관이 모여 당시 달러화 강세를 시정하기로 결의한 조치) 이후 일본과 독일이 자국 화폐가치 절상에 나섰고 달러화 가치는 이후 2년 동안 30% 이상 급락했다.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600원대까지 내려갈 정도로 원화 가치가 높아졌지만 일본, 대만 등 우리와 경쟁관계인 수출국의 통화 가치가 더 크게 상승하면서 상대적으로 반사이익을 누렸다. 금리가 낮은 까닭에 기업들은 돈을 빌려 투자하기 수월했고, 저유가와 저달러로 원자재 수입과 생산 비용도 줄일 수 있었다. 유가 하락은 가계의 실질 구매력 향상으로 이어져 소비도 늘었다. 1986~1988년 경제성장률은 매년 10%를 웃돌았고, 연간 30% 안팎에 달하는 수출 증가율은 만성 적자이던 경상수지를 흑자로 돌려놨다.
다시 2016년으로 와보자. 한국은행은 경기 부양을 위해 최근 2년 새 기준금리를 네 차례 인하했다. 박근혜 정부 취임 당시 연 2.75%이던 기준금리는 현재 연 1.5%까지 떨어졌다. 저금리로 기업들의 자금조달 비용이 낮아졌지만 이는 생산적인 투자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시장에서 퇴출돼야 할 좀비기업들의 수명만 연장시켰다. 또 1200조원으로 불어난 가계부채가 최대 뇌관이 된 것도 저금리 영향이 크다. 여기에 ‘빚내서 집 사라’는 정부 정책은 부동산시장의 거품만 키웠다. 금리가 낮으면 가계의 이자 부담이 낮아져 소비가 늘어나는 게 과거 유형이었지만, 지금의 가계는 빚 상환에 시달리고 전세 품절로 월세비 부담까지 가중돼 좀처럼 지갑을 열지 못한다.
저유가 효과는 어떨까. 휘발유 가격이 ℓ당 1300원대로 떨어지면서 운전자들의 부담은 그나마 줄었다. 그러나 시장의 예상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곤두박칠치는 유가는 오히려 세계경제나 한국경제에 악재가 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브라질 등 원유 수출로 먹고사는 신흥국의 재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수출과 중동지역 건설·플랜트 수주에 차질을 빚고 있다.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의 경기둔화 우려는 유가 하락을 부채질하고 있다. 유가 하락이 장기간 지속되면 물가 하락을 기대한 소비 감소→생산 감소→성장률 하락의 악순환에 빠지며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하락) 압력도 높아진다. 지난해 우리나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역대 최저치(0.7%)로 떨어진 것도 이 영향이 컸다. 중동 산유국이 전 세계 증시에 투자했던 ‘오일 달러’를 본격적으로 거둬들일 경우 가뜩이나 중국발 불안으로 출렁이는 국제 금융시장도 더 요동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환율이 오르면(원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기업은 이익을 본다. 원·달러 환율이 달러당 1000원일 때 수출을 한 기업이 3개월 뒤 수출대금으로 10만달러를 받기로 한 경우, 환율이 1200원으로 오르면 받을 돈이 1억원에서 1억2000만원으로 늘어난다. 가만히 앉아서 2000만원의 이득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수출 시장이 어느 정도 받쳐줄 때의 얘기다. 한국의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경기 둔화와 중동 산유국의 재정 악화로 지금은 환율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미국 경제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수출은 신흥국 비중이 60%에 달해 미국 경제가 회복된다고 해도 수출이 크게 늘어나긴 어렵다. 오히려 최근 같은 급속한 환율 상승은 외국인 자금 이탈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원·달러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인 달러당 1200원을 넘어서면서 환차손 부담이 커진 외국인 투자자들이 국내 증시에서 자금을 빼고 있다. 미국이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선다면 자금 유출 규모는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수출에만 의존하다보니 지금과 같은 글로벌 여건에서는 돌파구가 없는 상황”이라며 “내수를 살리려면 결국 중소기업과 서비스산업을 육성해야 하는데 이는 단시일 내에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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