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로 고통받는 가정 더는 나오지 말아야"

박송이 기자 2016. 1. 16.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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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용산참사로 남편 잃고 순화동 재개발로 쫓겨난 유영숙씨의 10년 투쟁기
유영숙씨는 356일간의 천막 농성을 마치고 병원에 입원 중이다. / 박송이 기자

대리전이었다. 대리전이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대리전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7년 전,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고 남편이 싸웠던 자리에서 남편 대신 싸웠다. “남편이 마음속에 함께 있었다. 늦은 밤 천막을 혼자 지키고 있어도 겁이 나거나 무섭지 않았다.” 투쟁, 자본가, 약자들의 권리. 매일 장사를 하느라 바빴던 유영숙씨(57)에게는 낯선 단어들이었다. 이제 그 단어들은 남편과 유씨를 연결하는 끈이다. “사람들은 내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계속 싸울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천막농성을 시작하면서 남편에게 약속했다. 남편이 순화동에서 찾겠다고 했던 권리,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라도 찾아주겠다고 남편에게 약속했다.”

지난 1월 8일, 유씨는 오랜 싸움을 끝냈다. 서울 중구 순화동 재개발 공사현장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인 지 356일 만이다. 유씨는 2005년에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지정된 순화동 철거민이다. 유씨는 1년간 천막농성 끝에 재개발조합으로부터 도의적 보상과 주거문제 보상 약속을 받아냈다. “물론 만족스러운 내용은 아니고, 아마 남편도 만족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니까, 남편도 지금 즐거워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1월 14일, 1년간의 천막농성을 마친 유영숙씨를 녹색병원에서 만났다.

막 진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온 유씨는 온몸이 아프다고 말했다. 진료를 받다 북받치는 마음에 한참을 울었다. 조합으로부터 합의를 받아냈다고 해도 마음의 상처는 보상받을 길이 없었다. 지난 10년간 세입자라는 이유 하나로 유씨와 그의 가족이 받아온 고통은 이미 유씨의 삶에 깊이 뿌리내려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됐다.

유씨의 싸움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유씨와 남편 고 윤용헌씨는 일방적인 재개발 통보를 받았다. 유씨와 그의 남편은 10년 가까이 순화동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름은 ‘미락정’이었다. 1997년에 문을 열었다. 장사는 잘됐다. 단골도 제법 있었고. 1층은 식당이었고 2층에는 손님 맞는 방이랑 살림집이 있었다. 큰아들 친구 엄마가 소개한 가게다. 가서 보니까 위치상 장사가 안 되는 곳이 아니었다. 괜찮다 싶었다. 다만 일반 가정집이었는데 토굴처럼 깜깜했다. 수리를 싹 다 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1년간의 천막농성 끝내고 병원에 입원 유씨는 음식솜씨가 좋았다. 목이 좋고 음식솜씨가 좋으니 장사가 잘됐다. “친정엄마가 음식솜씨가 좋았다. 엄마가 딸들은 결혼하면 어차피 힘들게 일하면서 음식하고 살아야 한다고 음식 만드는 법을 안 가르쳐 주려 했다. 음식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면 힘들어진다고. 그런데 어쩌다 보니 내가 음식장사를 하게 됐다. 처음에는 남편이랑 아동복 파는 장사를 했는데 그건 잘 안 됐다. 그 다음에 닭갈비집을 했는데 장사가 잘 됐다. 그 다음에 시작한 게 미락정이었다.” 주방에 따로 일하는 사람을 두지 않고 유씨 혼자 주방을 도맡았다. 힘은 들었지만 힘이 드는 만큼 돈도 벌었다.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둘째아이가 26주 만에 태어나서 인큐베이터에 있으면서 병원비로 집 한 채에 달하는 돈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두렵지 않았다. 돈은 열심히 살면 벌게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성실하게 남편과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았다.”

2005년, ‘미락정’이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공고해 보였던 삶의 기반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유씨는 세입자들에게는 아무 권리가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가게를 싹 수리해서 10년 동안 손님을 모았고, 단골을 만들었다. 그런 가게에 감정된 권리금은 고작 1500만원이었다. 인근의 상가 세입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300만원, 1000만원 수준이었다. 그 돈으로 다른 곳에 가서 장사를 시작하기는 어려웠다.

유씨의 남편은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다. 평생 장사만 해온 남편이었지만 앞장서서 싸웠다. 순화동 철거민 지역위원장을 했다. 용역을 앞세운 건설회사에 밀려 2007년 미락정의 문은 닫았지만 이후에도 남편의 싸움을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투쟁하는 걸 반대했다. 얼마 안 되지만 보상금 받고 다른 데서 다시 시작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권리를 찾아야겠다고 했다.” 남편은 순화동뿐만이 아니라 다른 재개발 지역에도 연대투쟁을 다녔다. 그때만 해도 이 싸움이 10년 동안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을 남편이 아닌, 유씨 자신이 매듭짓게 될 줄도 몰랐다. “2015년 1월 18일에 세입자의 권리를 다시 찾겠다고 천막농성 시작하러 순화동에 들어왔다. 그때 사실 마지막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집에서 정리를 다 해놨다.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엄마에게 불상사가 생기면 너희들이 이런 것을 갖춰야 하고 정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죽음은 겁나지 않았다. 사실 남편이 너무 보고 싶었다.”

남편은 7년 전에 죽었다. 2009년 1월 20일. 남편이 죽은 곳은 순화동이 아니라 용산이었다. 남일당 강제철거 현장에 연대투쟁을 하러 갔던 남편은 ‘용산참사’ 희생자가 돼 시신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도시환경정비사업지구였던 용산4구역 남일당 건물 망루로 떠나기 전 큰아들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이 집의 가장이니 엄마와 동생을 잘 챙겨.” 유씨의 삶은 뒤집어졌다. 세입자의 권리를 찾겠다고 시작한 일이 유씨의 삶을, 유씨의 가정을 무너뜨렸다. “우리 가족은 너무 행복하게 살았다. 재개발이 가정을 파괴하고, 아직도 국가폭력이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7년 지나도 진상규명도 제도개선도 없어 남편이 죽고 둘째아이는 충격을 받아 시력을 잃을 뻔했다. “아이가 아빠가 죽고 나서 충격으로 눈이 안 보였는데 그걸 4월에나 알았다. 밥을 먹다가 나무젓가락을 떨어뜨렸는데 아이가 줍지를 못했다. 그때서야 눈이 안 보인다고 이야기하더라. 너무 놀라서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충격을 받아서 눈에 출혈이 왔다고 했다. 수술을 했다. 수술은 잘됐다고 했지만, 또 재수술을 해야 했다. 나아지긴 했지만 지금도 둘째아이는 병원에 다녀야 한다.” 유씨는 자주 남편의 꿈을 꾼다. 생전의 건강한 모습의 남편이 아니라 남편의 시신이 자꾸 꿈에 나온다. “지금도 남편 이야기를 하면 부검 이후 남편의 시신을 확인하던 때가 비디오처럼 머릿속을 지나간다. 괴롭다.”

유씨는 아무것도 털어내지 못했다. 7년이 지나도록 진상규명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이제 6주기, 7주기를 헤아려 보는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 “6주기, 7주기는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진상규명이 하나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주기가 돌아올 때면 온몸이 아프다.” 진상규명의 당사자이자 용산참사의 책임자인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오는 4월 총선에서 경주 출마를 준비 중이다. 2010년 10월 20일 지역지인 <경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김 전 청장은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다. “경찰관이 무고한 시민을 죽게 한 것이 아니라 전국철거민연합이란 단체가 불법폭력으로 자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웃건물에 불을 지르고, 달리던 버스와 승용차를 향하여 화염병을 던져 무고한 시민이 언제 참변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참사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시위대에 돌리며 자신 또한 억울하게 경찰을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용산사고로 인해 나는 30년 몸담은 경찰을 떠나야 했다. 나는 경찰을 그만둔 후에도 그 분들의 명복을 비는 천도재에 참석했다.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불법 폭력시위가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꽃다운 나이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고 김남훈 경사를 생각하면 그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마음이 아프다. 고 김남훈 경사와 용산사고 당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엘리트 경찰에서 1등 CEO로> 중에서)

유씨는 김석기 전 청장을 ‘학살자’라고 부른다. “사람을 죽인 학살자들이다. 그런 사람이 총선에 나와 국회의원이 된다면 그 권력으로 칼자루를 얼마든지 휘두를 수 있고, 우리 같은 약자들은 다시 또 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사람들이 국회에 간다는 것만 봐도 정말 나라가 나라같지가 않다. 지난 총선에서도 선거에 나온다고 했다. 선거 때 경주에 찾아갔더니 돌아가신 분들 천도재를 지내줬다고 하더라. 이해가 안 간다. 공항공사 사장으로 내정됐는데 취임식도 제대로 못한 사람이다. 떳떳하다면 취임식을 왜 못하나.”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도 없었다. 2011년 말 국회에서 도시및주거환경정비법을 개정했다. 무리한 개발사업을 추진하지 못하게 하고 추진 중이던 곳을 다시 재정비하게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개정안은 재발 방지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부동산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뉴타운 광풍이 만들었던 개발사업에 출구를 마련해주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19대 국회에서 ‘강제퇴거 금지에 관한 법률’이 발의됐으나 3년째 계류 중이다. 반대하는 측에서는 재산권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권리금도 지난해 법적으로 보장됐다고는 하지만 재개발·재건축일 경우에는 예외로 규정해 실효성이 낮은 상황이다. 동절기 강제퇴거 금지 또한 재개발·재건축을 예외로 두고 있어 세입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보장도 어렵다.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이 없다 보니 세입자들은 여전히 유씨처럼 대책 없는 강제철거를 당해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2010년 1월 용산철거민 화재참사 유가족들이 남일당 참사현장 앞에서 진행되는 노제를 지켜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진상규명도 제도개선도 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유씨를 받쳐주는 유일한 심리적 지지대는 종교다. 참사가 일어나고 장례가 치러지는 1년 동안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가장 많이 의지했던 데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 “신앙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성당에 다니게 된 건 문규현 신부님 때문이다. 그때 문 신부님이 쓰러졌다. 남편이 죽었는데 우리 때문에 만약 신부님까지 돌아가시게 되면 너무 무거운 짐을 지게 될 것 같았다. 신부님 쓰러졌을 때 신부님이 다시 살아만 주시면 성당에 가겠다고 기도했다. 다행히 신부님이 일어나셨고 남편 장례 끝나자마자 바로 교리 받고 세례 받았다. 그 힘으로 더 싸울 수 있게 된 것 같다.”

용산참사 이후 순화동 재개발은 잠시 멈추는 듯했다. 그러나 2014년 말부터는 주상복합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유씨는 순화동에 다시 천막을 쳤다. 전기도 끊기고 물도 끊겼다. “천막을 치고 처음 46일 동안은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겼다. 추운 날 밑에서 물이 올라와도 버텼다. 같이 투쟁하던 지석준씨도 먼저 떠나고 마지막 67일은 혼자서 전기 없이 촛불하고 핫팩만 가지고 노숙을 했다.” 그래도 혼자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용산에서도 그랬지만 항상 남편이 가슴속에 있었다. 또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순화동에 다시 오기 싫었지만, 많이 고민하고 농성을 시작했다. 내가 권리를 못 찾으면 다른 재개발하는 곳은 더 심해질 것 아닌가. 내가 순화동에서 끝까지 해서 조금이라도 진전된 합의를 내놔야지 우리같이 가난한 사람들, 재개발한 지역의 철거민들, 이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순화동은 행복을 주고 또 빼앗은 곳 지난 7년 ‘유가족’은 유씨에게 각인된 정체성이다. ‘유가족’인 유씨의 눈으로 본 한국 사회는 기억을 앓는 곳이다. “어딜 가나 추모제가 많다. 어딜 가나….” 유씨에게는 그 추모의 기억들이 고통스럽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 나서 안산분향소에 다녀온 후 일주일을 앓았다. “용산참사도 국가폭력이 사람을 죽인 것이지만, 세월호는 국가가 산 아이들을 물속에 수장시키는 것을 중계하면서 본 것이다. 그 때 전기가 오는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세월호 유가족들 보면서 내가 다시 고통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화동에서의 10년은 그의 삶에서 ‘행복’했던 때다. 그때를 떠올리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남편이 자상했다. 내가 장사를 하니까 주말에 가사일은 남편과 아이들이 도맡아서 하고, 겨울에는 빙어낚시를 하러 갔다. 평범하지만 다시 올 수 없는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순화동으로 오고 싶지 않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행복을 다 빼앗아 간 곳이기도 하다.” 그는 순화동이 아닌 곳에서 삶을 다시 이어나갈 것이다. 아마도 깊게 잠이 들지 못할 것이다. “남편이 떠나고 집에 있어도 잠을 못 잤다. 잠 못 자고 밖을 쳐다보면서 불빛을 세고 있었다. 그냥 앉아서 창 밖을 보면서 밤새우고 불빛 하나씩 꺼지는 것 보고 그랬다. 퇴원하면 일단 쉬고 싶다. 너무 힘들었다.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재개발로 우리같이 고통 받는 가정이 더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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