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의 신사 vs. 코트의 마피아
테니스 시합이 열린다. 한 선수의 서브가 아슬아슬하게 아웃 판정을 받았다. 세컨 서브를 준비하고 있는 선수에게 상대 선수의 한 마디가 들려온다.
"이거 아웃 아니에요. 심판한테 재심 요청하세요 (That was in if you want to challenge it)"
"그래요? (Was it?)"
"맞아요 (Yeah) 재심 요청하세요 (Challenge it)"
선수도 심판도 관중들도 조금은 당황했다. 잠시 후 컴퓨터 판독이 진행됐다. 결과는 첫 서브가 아웃된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하게 라인 위에 떨어진 것으로 나왔다. 결국 서브 에이스가 인정됐다.
호주 퍼스에서 지난 5일 열린 호프만컵 테니스 대회에서 실제로 벌어진 상황이다. 서브를 넣은 선수는 레이튼 휴이트, 심판의 오심을 지적한 상대 선수는 잭 삭이다. 1세트 5대4로 앞서던 잭 삭은 결국 1세트 7대5, 2세트 6대4로 패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잭 삭은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코트의 신사로 큰 박수를 받았다.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하고 승패를 떠나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잭 삭의 모습은 스포츠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다.
잭 삭의 스토리를 보면서 2년 전 미국의 학원 스포츠를 취재하던 충격이 다시 생각났다. 여자 고등학교 테니스 경기였다. 미국에서 명문 대학에 진학하려면 고교 시절 스포츠 활동은 사실상 필수다. 당연히 고교 시절 공식 대회 성적은 중요한 대학 진학 자료로 활용된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공식 시합에 심판이 없었다. 선수 두 명이 서로 합의하에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양 쪽의 코치들도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학생들 사이에 판정을 둘러싼 이견이 발생할 때만 선생님들이 개입한다고 했다. 그들은 명예판정(Honor Call)이라 불렀다.
그런데 실제로 거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선수들 스스로 책임감을 갖고 정직하게 플레이하는 교육적 효과가 크다고 했다. 농구처럼 큰 돈을 버는 스포츠도 아니기 때문에 심판 비용을 절약한다는 현실적 이유도 있다고 했다.
잭 삭의 정정당당 스토리를 보면서 잠시나마 행복했다. 그런데 잠시 후 조금은 슬픈 느낌이 다가왔다. 승부조작과 판정시비, 심판매수,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나라 스포츠 현장이 떠올랐다.
이기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국 스포츠에서 학생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지도자는 승리를 위해서 폭력을 행사하고 심판을 매수한다. 학부모는 내 자식만 대학에 갈 수 있다면 불법이라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인다.
일부 파벌이 장악한 협회와 연맹은 사적 이익을 위해 승부조작과 입시비리에 적극 가담하고 있다. 협회 관계자, 심판, 지도자들이 연계한 파벌은 말 그대로 '코트의 마피아'처럼 스포츠계를 유린하고 있다.
정정당당한 스포츠 세계가 아니라 불법부당한 스포츠 세계다. 교육 현장이 아니라 오직 승리만을 생각하는 전쟁터다.
잭 삭이 보여준 스포츠 정신, 미국의 고등학생들이 보여준 명예로운 모습은 진정 대한민국 스포츠계에서 사라진 것일까? 부당한 승리보다 정당한 패배를 선택할 수 있는 '코트의 신사'는 어디로 갔을까? '코트의 마피아'들이 장악한 한국 스포츠에 '코트의 신사'들을 위한 자리는 과연 존재할까?
정재용기자 (spoyong@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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