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이사풍습 '신구간'을 아시나요

김영헌 2016. 1. 1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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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토박이기자의 제주탐구생활(3)

제주의 이사가 한 겨울에 유독 몰리는 건 신구간이란 독특한 이사 전통 때문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겨울 제주만의 전통 이사풍습 신구간

1년치 집세 한꺼번에 내는 ‘죽어지는 세’도

미친 집값에 서민들 내집마련 꿈 포기

한겨울에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있다. 따뜻한 봄이나 가을을 놔두고 굳이 한겨울 추위 속에서 눈이 오거나 말거나 제주 곳곳에서 이사행렬이 이어진다.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제주 특유의 이사 풍습인 ‘신구간(新舊間)’ 때문이다.

24절기 중 대한(大寒) 후 5일부터 입춘(立春) 전 3일까지 약 1주일 동안을 ‘신구간’이라 하며, 올해는 1월 26일부터 2월 1일까지다.

제주사람들은 ‘신구간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내려온 신들의 임기가 다 끝나 구관(舊官)과 신관(新官)이 교대되는데, 이 기간에는 구관은 하늘로 올라갔고 신관은 아직 지상에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두려워서 못했던 일들을 해도 아무런 탈이 없다’고 믿어왔다. 쉽게 말해 제주의 1만8,000여 온갖 지상신들이 신구간에 임무를 교대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서 자리를 비우는 기간이어서 집을 옮기거나 수리해도 ‘동티(예부터 금기시되어온 행위를 해 귀신을 노하게 했을 때 받는 재앙의 하나)’가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또 신구간 풍습이 제주에서만 이어져 온 이유 중 하나는 기후적 요인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윤용택 제주대 교수의 ‘제주도 신구간 풍속 연구’를 보면 제주에서 일평균 기온이 5도 이하인 날은 한 해 8일에 지나지 않으며, 이 같은 기온을 보이는 기간이 바로 신구간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세균의 활동이 뜸한 5도 미만의 날씨가 드문 제주에서는 세균번식이 위축되는 유일한 시기가 신구간이고, 방역이 허술하던 시절 위생상에 문제가 되어 못했던 집수리와 화장실 개축도 별 탈이 없었다. 이는 신구간에는 지상에 신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동티가 안 난다는 속신과도 잘 맞아 떨어진다는 게 윤 교수의 주장이다.

요즘은 젊은 세대들이나 외지 사람들이 제주에 많이 거주하면서 조금씩 신구간에 이사를 가는 경우가 줄고 있지만 여전히 신구간의 영향은 여전하다.

신구간을 전후해 새집을 비롯해 월세, 전세 등의 거래물건이 쏟아지고, 주택건설업체도 신구간에 맞춰 입주할 수 있도록 집을 짓기 때문에 자칫 이 기간을 놓치면 집구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집 구하기뿐 아니라 이사 관련 업체들은 제주에만 존재하는 ‘신구간 특수’로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신구간에 이사를 하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이삿짐센터 예약을 서둘러야 하며, 이삿짐센터의 최대 성수기라 비수기에 적용되는 비용 할인도 거의 없다. 심지어 대규모 아파트 공급이 이뤄질 때는 육지의 이삿짐센터가 ‘원정’을 오는 일도 있다. 가전제품 판매대리점과 가구판매업체 등도 ‘신구간 세일’을 외치며 치열한 고객 유치전에 나서고, 집 청소업체나 도배, 인테리어업체 등은 밤샘작업이 이어진다.

신구간과 함께 제주에는 집과 관련 또 다른 독특한 임대문화가 있다.

육지에서는 집을 빌릴 때 내는 월세와 전세, 반전세 등과 달리 제주에서는 1년치 집세를 한꺼번에 내는 세인 ‘죽는 세’ 혹은 ‘죽어지는 세’가 있다. 집세 1년치를 목돈으로 집주인에게 내지만 매달 닳아서 나중에는 죽어 없어진다 해 ‘죽어지는 세’, 혹은 ‘죽는 세’라는 이름이 붙었다.

물론 제주에도 전세나 반전세, 월세 등도 있지만 집주인들이 꺼리기 때문에 ‘죽어지는 세’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죽어지는 세’인 경우 매년 신구간이 돌아오면 다시 임차인과 임대인들이 계약을 갱신한다. 보증금 반환이나 집세로 다툼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매년 목돈을 한꺼번에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임대업자들에게 제주는 천국인 셈이다.

얼마 있지 않아 올해도 신구간이 시작되지만 예년과는 분위기가 좀 다를 것 같다. 수 년 전부터 불어온 부동산 열풍이 지난해 절정을 맞아 1년 사이 집값이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제주에 집값이 오르면 좋지 않느냐 반문하지만 자신의 집값이 오른 만큼 다른 집들도 동반상승하기 때문에 기존 집을 팔아도 다른 곳으로 이사할 곳이 마땅치 않다. 결국 오른 집값에 해당하는 세금만 더 내야 하는 처지가 된다.

더욱이 집도 없는 서민들은 1년 사이 수 천 만원씩 오르는 ‘미친 집값’을 보면서 내집마련 꿈을 아예 포기해야 하고, 또한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집세가 오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게 제주의 현실이다.

제주=김영헌기자 taml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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