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겨울 헤드폰서 들리는 따뜻한 소리

2015. 12. 2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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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0일 일요일 흐림. 헤드폰.#188 Roy Ayers 'Everybody Loves the Sunshine'(1976년)
[동아일보]
로이 에이어스의 ‘Everybody Loves the Sunshine’ 앨범.
헤드폰은 20세기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나보다 기계나 자동차를 20배 더 잘 아는 대다수 남자라면 코웃음 칠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내겐 그렇다.

영화 ‘허니와 클로버’를 기억한다. 미술학도 아오이 유가 커다란 헤드폰을 쓰고 자기 몸의 다섯 배쯤 되는 캔버스에 유화를 그리다 문득 카메라 쪽을 돌아보던 그 순간. 하얀 교복을 입은 유이치가 청보리밭 한복판에서 헤드폰으로 릴리 슈슈의 노래를 듣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도입부를 어떻게 잊을까.

헤드폰의 계절이 왔다. 귀를 가려주니 물리적 보온 효과를 갖춘 데다 고막을 감싸고 청신경으로 전해져 오는 따뜻한 음향까지 있으니 겨울 용품으로 제격이다. ‘라붐’의 무도회 장면, ‘샤인’의 트램펄린 장면, ‘봄날은 간다’의 자연음향 녹음 장면…. 이 20세기 인류 역사의 보물은 여러 영화에서도 중요한 소품으로 쓰였다.

헤어밴드가 잘 어울리는 사람은 적지만 헤드폰이 안 어울리는 사람은 별로 없다. 헤어밴드 같은 연결부와 귀를 감싸는 두툼한 스피커 부분은 그 모양새도 좋고, 관찰자에게는 비밀처럼 감춰진 그 안의 음악 때문에 아우라를 풍긴다.

이왕이면 그가 여자였으면 좋겠다. 음악에서 자라 나온 듯한 긴 머리칼 때문일까. 두 눈을 지그시 감은 피에타의 성모처럼, 그녀는 내 맘속 깊은 그늘에 깔린 치기와 저열함, 슬픔까지도 경청해줄 수 있을 것만 같다.

헤드폰의 대부가 등장할 차례다. 닥터 드레 말이다. 빨간 소문자 d의 주인. 앨범 ‘The Chronicle’이나 에미넘의 제작자보다 비츠 바이 닥터 드레의 창립자로 이제는 더 유명해진 사람. 그가 속했던 갱스터 랩 그룹 N.W.A에 관한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에서 드레가 등장하는 장면이 기억난다. 레코드판이 어지럽게 널린 방바닥에 누워 그가 턴테이블에 연결된 헤드폰 속 음악을 듣는다. 흐뭇한 미소로 눈을 감고 건반의 상향선율에 맞춰 양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대상은 로이 에이어스의 ‘Everybody Loves the Sunshine’이다. 수많은 힙합 곡에 샘플링된 이 곡은 중독적인 신시사이저 반복구, 몽롱한 화성과 선율로 나른한 오후의 심상을 그려낸다. 어쩐지 르누아르의 그림 속 인물들이 헤드폰을 쓰고 일광욕을 즐기는 공상이 떠오른다. 겨울의 계단에서 햇빛에 만취한 날들을 그린다.

그녀는 지금 뭘 듣고 있을까. 궁금하다. 그래서 미칠 것 같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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