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우린 다 할 만큼만 하고 사는 거예요"(인터뷰)

정시우 2015. 12. 9.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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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정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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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정재영 배우에게 다소 우스꽝스러운(?) 포즈의 사진을 메인으로 걸어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하지만 이 포즈에 담긴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꼭 전하고 싶은 마음에 선택했으니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는 이보다 더 망가지는 사진을 공개한다고 해도 기분 좋게 웃어 보일 사람이지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이 사진을 찍은 포토기자에게 정재영과의 첫 인터뷰가 바로 그런 날이었다. 수습을 끝내고 정기자 직함을 단 후, 처음으로 찍는 인터뷰 사진. 첫 정식 미션을 앞두고 극도로 긴장하고 있는 후배의 긴장을 풀어줄 겸, 사진촬영에 앞서 정재영에게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속 도라희(박보영)와 같은 상황에 있는 친구입니다”라고 포토기자를 소개했다. 그랬더니 정재영은 “신입기자”냐며 반갑게 반기더니, 그 특유의 괄괄한 웃음과 함께 분위기를 부드럽게 리드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처음이니 평생 남을 유니크한 사진을 찍으라”며 비상구 유도등 밑에서 위 사진의 포즈까지. 그의 노련함과 배려와 재치에 괜히 코끝이 시큰해지는 순간이었다. 인터뷰가 끝난 후, 포토기자에게 정재영 같은 배우를 첫 인터뷰이로 만난 건 큰 운이라고 했는데, 아마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여러 인터뷰이를 거친 후에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처음’의 의미를, ‘처음’의 기억을, ‘처음’의 그리움을 새삼 일깨워준 정재영과의 대화를 공개한다. 당신의 ‘처음’은 어떠셨는지.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Q. 이제 막 시작하는 어린 후배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정재영: 너무 좋지요. 풋풋하고. 사실은 참 그립습니다. 나의 처음이. 처음이라는 게 불안하기도 하지만 기대도 되는 거잖아요. 무엇보다 젊음이라는 게 참 부럽죠. 기대감과 열정을 품은 나이니까.

Q. 20대의 정재영은 어땠나요. 범상치 않았을 것 같은데.
정재영: 저는 굉장히 평범했습니다. 학교에서도 약간 아웃사이더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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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아웃사이더요? 의외네요.
정재영: 그러게요. 왜 그랬지? 겉멋이었나? 하하하. 내성적인 편이었습니다. 사람 많은 자리를 별로 안 좋아했죠. 연기는 열심히 했지만, 어떤 집단에 속해서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일을 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넉살도 좋아지고. 배우라는 게 그렇더라고요. 더 열어야 더 자유스러워지더라고요. 직업에 맞게 변한 것 같습니다.

Q. 20대로 돌아간다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뭔가요.
정재영: 그 짓을 또 하라고요?(일동웃음) 돌아간다면 오히려 덜 열심히 할 것 같습니다. 그때는 되는 건 없고, 열정만 있었어요. 여유가 너무 없었죠. 노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즐기지 못했어요. 집에도 안 들어가고, 매일 작업했던 기억이 나네요.

Q.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게 했나요.
정재영: 뭔가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됐으니까.

Q. 그게 바로 연기군요.
정재영: 네. 그 전까지는 뭔가를 좋아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취미도 없고 특기도 없었죠. 별 생각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웃음) 그러다가 연기라는 구체적인 뭔가를 만난 거죠.

Q. 연기의 어떤 면에 빠지신 겁니까.
정재영: 원래는 연극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닙니다. 막연하게 자유로운 직업을 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 방송부였는데 재미있었습니다. 그런 쪽으로 뭔가를 하면 좋겠다 싶었죠. 신문방송학과를 가야 하나 생각했는데, 당시 신문방송학과 커트라인이 엄청 높았어요.(웃음) 비슷한 게 뭐가 있나 봤더니 연극영화과가 있더라고요. 이전까지 연극영화과는 한 번도 생각 해 본 적이 없었어요. 특별한/이상한 사람들만 가는 곳인 줄 알았거든요.(웃음) 점지 된 사람들만. 그런데 우연히 참가한 연극제에서 상을 덜컥 받았지 뭐예요.

Q. 청소년 연극제인가요?
정재영: 네. 서울예대(이전 서울예전)에서 주체하는 동랑청소년연극제가 있었어요. 전국에 있는 연기 잘하는 친구들이 참가하는 연극제인데, 제가 최우수상을 받은 거예요. 초짜인 제가!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 하재관

Q. 정형화 되지 않은 연기가 오히려 높은 점수를 받은건가요?
정재영: 맞아요. 그게 더 점수를 딴 거죠. 얻어걸린 거예요. 하하하하. 나에게 소질이 있나 하면서 서울예대에 얼레벌레 입학했는데, 이게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깨지기도 많이 깨졌지만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하나의 연기를 올리기 위해 공동 작업을 하고 밤을 새는 것도 너무 재미있고. 콩깍지가 딱 씌워진 거죠.

Q. 어떤 걸 좋아하는지 잘 모르셨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꿈을 빨리 찾은 편이신 것 같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친구들도 많잖아요?
정재영: 그런 셈이죠. 연극이 아닌 영화를 생각한 건,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하면서 부터예요. 저는 그때부터 리얼리티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극단 목화나 연우무대처럼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곳이 많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유리동물원’(T.윌리엄스)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 같은 번역극이 대다수일 때였거든요. 가발 쓰고 “안녕, 톰?” 이런 대사를 주로 했죠.(웃음) 당시 연극이 과도기였습니다. 그에 반해 영화는 매체 성격상 훨씬 더 리얼리티하게 연기하니까 마음이 갔던 거죠.

Q. 리얼리티 이야기를 하셨는데, 최근 홍상수 감독님의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영화감독 함춘수 역을 맡아 캐릭터를 흡수한 듯한 생활연기를 펼쳐보이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정재영과 홍상수 감독이 참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 만남이 처음 성사된 게 ‘우리선희’(2013)였고, 예상대로 너무 좋은 호흡을 보여주셨죠.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는 조금 다른 경우이긴 한지만 정재영 씨 특유의 생활연기가 살아있는 영화처럼 보였습니다.
정재영: 픽션을 연기하지만 리얼해 보이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어떤 장르를 연기하더라도 연기 자체는 리얼리티인 거죠. SF 장르라고 해서 SF 연기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주에 있는 것처럼 리얼하게 연기하는 게 배우가 해야 하는 일이죠. 기술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아마 더 리얼하게 갈 겁니다. 영화 속 인물처럼 보이게 하는 건, 제 평생의 숙제에요. 그래야 보는 분들이 공감할 테니까요.

Q. 캐릭터에 따라 부담의 농도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가령 70대 노인을 연기해야 했던 ‘이끼’(2010)의 경우, 그리 쉬운 작업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정재영: 그렇죠. ‘이끼’는 사실 너무 힘들었어요. 제대로 하고 싶은데 흉내만 내다가 끝낸 느낌이 들었습니다. 40대인 제가 70대의 몸과 성대를 표현하려다보니 부대꼈던 거예요. 남들은 괜찮다고 하는데, 저는 성에 안 차더라고요. 그런데 남의 걸 흉내 내는 건 한계가 있다고 봐요. 아무리 변신했다 어쩌고저쩌고 해도 완벽한 변신은 못합니다. 내가 아닌데 어떻게 완벽하게 그 인물이 되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변신은 나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걸 꺼내서 하는 게 가장 진정성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캐릭터에 따라 내 안의 것들을 조금씩 변주해 가는 거죠.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함춘수

Q. 그렇다면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의 하재관은 정재영의 어떤 면을 가장 극대화시킨 건가요?
정재영: 버럭? 하하하. 화가 아주 많이 났을 때 하는 걸 시도 때도 없이 한 셈이죠.

Q. 정재영 씨는 술 마시는 신이 유독 많은 배우입니다.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서도 어김없이 포장마차 장면이 등장하더군요.(웃음)
정재영: 하하하하하. 많은 분들이 물어보세요. “술 마시는 장면 찍을 때 진짜 마시냐”고. 그럼 “당연한 이야기를 왜 물어보냐”고 하죠. 저는 안마시고 연기하는 게 더 이상하거든요. 그게 더 대단한 것 같고요. ‘술 안마시고 어떻게 만취연기를 하지?’ 싶어요. 그리고 사람이 술을 마시면 일단 ‘스킨 톤’부터 달라지잖아요? 마셨는지 안 마셨는지 미세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속이는 연기가 불가능하죠. 또 취하면 취할수록 사람은 반대급부로 안 취한 척을 합니다. 그런 것들을 아예 안마시고 연기할 자신이, 전 없어요.

Q.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를 보면 연예부 기자들은 글 하나로 스타의 이미지를 훼손하기도 하고 띄워주기도 하더군요. 실제로 언론은 연예인의 이미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언론이 만들어 놓은 정재영의 이미지와, 스스로가 느끼는 본인의 이미지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 같나요?
정재영: 글쎄요. 우선 언론이 만들어 놓은 제 이미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대중의 호응이 없는 것일 수도 있고요.

Q. 어떤 의미인가요.
정재영: 인터뷰를 하면 많은 기자 분들이 그런 글들을 써 주세요. ‘정재영은 옆집 아저씨 같고, 소탈하고, 배우 같지 않고, 개성파고…’ 하는 것들이요. 그런데 그건 언론이 만든 제 이미지가 아닙니다. 실제의 저입니다. 기자 분들이 인터뷰 때 느끼신 점들을 긍정적으로 써 주시는 것일 뿐이죠. 그랬을 때, 대중들이 거기에 그리 큰 관심을 가지시는 것 같지도 않아요. 그런데 사실, 관심이 크지 않은 게 저는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배우는 영화 속에서, 무대 위에서, 그 인물로 그때그때 보여 지는 게 최상이라고 생각하거든요.

Q. 언론이 말하는 정재영의 모습과 실제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셨는데, 그 말에 핵심이 있는 것 같군요. 본인의 이미지를 감추고 꾸미는 배우들도 없지는 않으니까요.
정재영: 아, 이미지를 만든다? 저는 누군가를 속일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지 못합니다.(웃음) 그리고 속고 속이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런 생각은 합니다. 대중들에게 너무 많은 걸 보여 줄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요. 아까도 말씀드렸듯, 작품 속 인물로 보여 지고 싶은 게 제가 생각하는 최고니까요. 가령 제 아내는 제 영화를 제대로 못 봅니다. 아이들도 가짜라는 걸 너무 잘 알죠. 가족이니까 몰입을 못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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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알면 알수록 방해가 되는 것들이 있죠.
정재영: 네. 이미지와 관련해서, 젊은 인기 배우들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경우 특히나 속마음을 보이는 게 조심스러울 수 있어요. 인터뷰라는 게 활자를 통해 대중들에게 가잖아요? 배우가 말한 것들이 활자화되는 과정에서 의미가 다르게 변색되기도 하니, 아무래도 말을 조심하게 되겠죠. 그런데 저는 말을 좀 막 하는 스타일이라. 하하하. 저는 그건 믿습니다. ‘악의가 없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는 믿음이요.

Q. ‘악의가 없는 진실’이라. 하재관 역시 그랬죠. 악의가 없는 그의 진실을 사람들이 결국 알아줬죠.
정재영: 결국 중요한 건 당사자가 어떤 생각과 신념을 가지고 있느냐 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의 의도가 오해되는 경우들을 진짜로 많이 만나잖아요. 부모자식, 부부간에도 오해합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오해해요. 평생 살아도 서로를 모르는 거죠. 부부도 서로를 완벽히 모르는데,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얼마나 알겠습니까. 상대의 뜻을 악의 없이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나오는 “우리의 삶의 표면에 숨겨진 것들의 발견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길”이라는 대사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정재영: 그 대사 좋죠.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우린 다 그냥 할 만큼만 하고 사는 거예요.”입니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예능이 그래요. 10년 넘게 “나가라” “안 나간다” 이런 걸로 홍보팀과 싸우고 있어요. 물론 제 인지도가 높아지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고, 저 개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건 충분이 알겠어요. 하지만 인지도가 높아진다고 한들, 예능을 통해 높이는 게 과연 맞는가라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영화를 통해 나를 알리고 싶은 거죠. 신비로워 보이려고 안 나가는 것도, 예능을 터부시하거나 폄하해서도 절대 아닙니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어요. 제 진심은 배우이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연기를 하고 싶은 것일 뿐인 거죠. (홍보팀 눈치 슬쩍 보며)그걸 조금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게 제 마음인 거죠. 하하하하.

Q. 배우로서의 본령에만 집중하고 싶은 마음이네요.
정재영: 그것만 하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는 거죠. 그리고 저는 하나를 하면 다른 건 잘 못하는 성격이라, 괜히 오지랖만 넓어지면 안 될 것 같아요. 우린 다 그냥 할 만큼만 하고 사는 거죠. 진심을 다해.

정시우 기자 siwoorain@
사진. 조슬기 기자 ke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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