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박정희 정권이 암살로 끝난 게 걱정스러웠어요"

고명섭 2015. 11. 2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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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14회 유신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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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79년 11월6일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자격으로 ‘박정희 시해사건 수사’ 발표를 한 육군 소장 전두환의 등장은 군사정권 연장의 암운을 드리웠다. '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5월30일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되고 한 달 뒤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가 방한했다. 카터는 1977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한반도 인권외교와 주한미군 철수’를 정책으로 천명한 터였다. 민주화 세력은 일제히 카터 방한에 반대했다. 독재자와 회담하는 것이 카터의 인권외교 원칙에 맞느냐는 비판이었다. 양심범가족협의회는 ‘카터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내 정치범 1500여명이 감옥에 갇혀 있고 고문과 감시와 압제로 인권이 짓밟히는 현실을 지적하며 방한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김대중이 공동의장으로 있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도 카터의 방한에 찬성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카터는 6월29일 2박3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두 차례 박정희와 정상회담을 했다. 박정희는 카터 앞에서 혼자 40분 동안 이야기하며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했다. 카터는 2차 정상회담에서 한국 인권 문제를 거론했다. 박정희는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했다. 회담은 두 사람이 감정싸움을 벌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 추가 철수를 1981년까지 연기하는 데 합의했다. 박정희는 반정부 인사를 석방하기로 약속했다. 7월17일 제헌절을 맞아 박정희 정권은 박형규·양성우·송기숙을 포함한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풀어주었다. 미군 철수 중지를 얻어낸 박정희는 미국에 맞서 자기 뜻을 관철했다고 생각하고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1979년 봄 김대중, 박정희 면담 요청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얘기하자”
한참 뒤 ‘거절’…끝내 못 만난 ‘정적’



8월 ‘YH노동자 김경숙’ 진압에 사망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박탈’
‘야당탄압’에 분노 ‘부마항쟁’ 폭발

1979년 10월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이 오랜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지면서 ‘군사독재 18년’은 돌연 막을 내렸다. 그해 5월30일 이후 5개월째 가택연금 상태에서 ‘10·26’을 맞은 김대중은 “쿠데타나 암살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며 사태를 주시했다. 1979년 12월20일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선고공판에서 김재규는 “개인의 정분을 끊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진술했다.'한겨레' 자료사진

1979년 8월 ‘와이에이치(YH)무역 사건’이 일어났다. 경영난에 빠진 가발수출업체 와이에이치무역이 종업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폐업을 통고한 뒤 벌어진 일이었다. 미국시민권을 지닌 사주는 미국에 가발을 팔고 받은 대금을 현지로 빼돌렸다. 10대~20대 여성이 대다수인 노동자들은 몇 달 동안 임금을 받지 못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4월 회사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으나 돌아온 것은 기숙사 식당 폐쇄였다. 더 호소할 곳을 찾지 못한 여성 노동자 170명은 8월9일 마포 신민당사를 점거해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노동자 중에는 전남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한 스물두 살 김경숙도 있었다. 김경숙이 남긴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에는 어느 누구나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사람이었다. (…) 내가 배우지 못한 공부를 동생들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간절한 소원이었다. (…) 하청공장에 취직을 하여 말로만 듣던 철야작업을 밤낮으로 하면서 약 2개월은 나의 코를 건들지도 못했다. 너무나 피곤하다 보니 끊임없이 코피가 나는 것이다. (…) 혼탁한 먼지 속에 윙윙대는 기계 소리를 들으며 어언 8년 동안 공장생활을 하고 남은 것은 병밖에 없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마음은 상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리라 다짐한다.”

1979년 내내 김대중은 동교동 집에 갇혀 감시를 당했다. 사진은 1978년 12월27일 특사 석방 직후 찍은 가족사진으로, 모처럼 이희호와 홍일·홍걸·홍업 세 아들 모두 웃음을 되찾은 순간이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경숙의 다짐은 얼마 가지 못했다. 농성 사흘째인 8월11일 새벽 2시 경찰은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의 눈에 노동자의 인권은 보이지 않았다. 진압 경찰 1000여명은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신민당 원내총무 황낙주가 짓밟혔고 대변인 박권흠의 얼굴이 피범벅이 됐다. 취재 중인 기자들까지 폭행당했다. 기동대에 쫓긴 김경숙은 4층 창문에서 떨어져 숨졌다. 23분 만에 끝난 진압은 당사를 폐허로 만들었다. 경찰은 노조 간부들을 구속하고, 인명진·문동환·서경석·이문영·고은을 비롯해 여덟 사람을 배후조종자로 엮어 함께 구속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정권의 폭력에 항의하여 당사 농성을 벌였다. 미국 국무부도 경찰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논평을 냈다.

경호실장 차지철 “까불면 쓸어버려”
중정부장 김재규 “버러지 같은 놈…”
10월27일 새벽잠 깨운 LA 지인 전화
“대통령이 총맞아 암살당했다는데”



11월6일 전두환 합동수사 결과 발표
“왠지 섬뜩…남편 표정도 굳어졌어요”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사 농성을 진압함과 동시에 김영삼을 제거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8월13일 신민당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을 회유해 김영삼과 총재단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도록 했다. 9월8일 서울민사지법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여 전당대회 의장 정운갑을 총재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법원 판결에 관계없이 김영삼을 계속 총재로 인정하기로 결의했다. 김영삼은 9월10일 “범국민적 항쟁을 통해 박정희 정권 타도 운동을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남편은 그때 가택연금 중이었어요. 움직일 수 없으니 홍일이를 동교동계 의원들에게 보내 김영삼 총재를 지원하라고 독려하는 메모를 전했지요.”

김영삼은 9월15일 <뉴욕 타임스>와 회견해 “카터 행정부는 독재자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적인 반국가적 언동이라고 규정하고 의원직 박탈 징계안을 냈다. 10월4일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들은 국회 경호권을 발동한 상태에서 김영삼 제명 안건을 10분 만에 날치기로 처리했다. 정권의 폭거에 항의해 신민당 소속 의원 66명 전원이 10월13일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냈다. 통일당 의원 3명도 동참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79년 10월26일 죽어서야 청와대를 나왔다. 사진은 9일장이었던 국장의 마지막날인 11월3일 중앙청 영결식에서 근혜·지만·근령(오른쪽부터) 세 남매가 영정 앞에서 예를 올리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0월16일 부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부마항쟁’의 시작이었다. 이날 오후 부산대 학생 5000여명과 동아대 학생 1000여명이 유신헌법 철폐와 독재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교문을 나와 거리시위를 벌였다.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고 해가 저물자 시민들이 합세해 시위대가 5만여명에 이르렀다. 시민항쟁이었다. 시민들은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단하라” “김영삼 제명 철회하라”고 외쳤다. 시위대는 방송국·세무서·경찰서·파출소를 공격했다. 유신체제를 지탱해온 국가기관과 언론기관을 향한 분노의 표출이었다.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 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했다. 1000여명이 잡혀갔다.

항쟁의 불이 꺼지는 듯하더니 마산에서 다시 타올랐다. 18일 오후 경남대 학생 1000여명이 번화가로 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곧바로 시민 수천명이 합세했다. 시위대는 파출소·방송국·신문사에 돌을 던졌다. 일부 시위대는 공화당사에 쳐들어가 집기를 부수고 박정희 사진을 떼어내 부수었다. 19일에는 시위가 더욱 격해져 공공기관이 습격당했다. 정부는 10월20일 정오에 마산·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시위대 500여명이 연행됐다. 위수령 발동과 공수부대 투입으로 마산 시위는 표면상 가라앉았다. 분노한 민심은 진압부대의 군홧발 밑에서 용암처럼 들끓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국가관리 능력이 한계에 부딪쳤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1970년대 내내 박정희는 군사작전을 펼치듯 경제의 외형적 성장을 밀어붙였다. 1977년에는 목표보다 3년 앞당겨 수출 100억달러 달성을 자축하기도 했으나 1978년부터 중화학공업 중복투자의 후유증으로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이란 혁명으로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경제는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았다. 노동자들과 서민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부마항쟁은 개발독재 성장주의의 누적된 폐해가 야당 탄압이라는 도화선을 타고 폭발한 사건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부산에 계엄이 선포되고 난 뒤 현장에 내려가 사태를 관찰했다. 단순한 학생시위가 아니라 시민항쟁이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박정희 앞에서 “탱크로 밀어 캄보디아에서처럼 200만~300만명만 죽이면 조용해진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10월23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성명을 내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국군을 정권안보에 동원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부산과 마산에서 타오른 항쟁의 불길이 전국으로 옮겨붙을 조짐을 보였다. 광주와 서울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었다.

10월27일 새벽 4시 동교동 집의 전화벨이 울렸다. 이희호는 잠결에 깨어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잘 아는 분이 로스앤젤레스에서 건 전화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총에 맞아 암살당했다고 하는데 아느냐고 물어요. 우리는 깜짝 놀랐어요. 전화를 끊고 라디오를 켜니 박정희 대통령 유고라는 발표가 나왔어요.” 7시가 넘어 정부는 박정희의 사망 사실을 알렸다. “우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다는 사실을 그 직후에 알았지요.”

박정희는 10월26일 저녁 6시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만찬을 했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그리고 여성 가수와 모델이 참석했다. 김재규와 차지철은 시국수습책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 박정희가 차지철 편을 들었다. 차지철은 “까불면 신민당이든 학생이든 싹 쓸어버리겠다”고 큰소리쳤다. 김재규는 7시35분께 “각하! 이따위 버러지 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 하면서 권총으로 차지철을 쏘고 이어 박정희를 저격했다. 김재규는 뒤에 법정에서 “개인의 정분을 끊고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다. 김재규의 거사로 18년 장기독재는 한순간에 막을 내렸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박정희가 심복의 총탄에 죽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보다는 불안을 느꼈다. “우리는 박정희 정권이 암살로 끝난다는 게 걱정스러웠어요. 국민의 힘으로 독재를 물리쳐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고 독재자가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이 우리 민주주의에 이롭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지요.” 김대중은 박정희 암살 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와 회견할 때도 그런 생각을 밝혔다.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재규를 의인으로 보는 사회 분위기와 사뭇 다른 의견이었지만, 이희호와 김대중은 그 뒤로도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남편은 생각이 달랐어요. 박정희 대통령과 단 한 번도 마주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늘 안타깝게 생각했어요.” 김대중은 박정희가 암살당하기 몇 달 전인 1979년 봄에 박종태·예춘호·양순직을 통해 만나고 싶다는 뜻을 박정희에게 전달한 적이 있었다. 김대중의 뜻은 이러했다. “우리가 20년 가까이 서로 대립만 하고 이야기도 하지 않는 것은 곤란한 일이 아니겠는가?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나의 조건은 단 한 가지다. 대통령은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뭐든지 말해 달라. 좋은 얘기든 나쁜 얘기든 무엇이든 이야기해 달라. 그 대신에 대통령도 내 말을 충분히 들어 달라. 서로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상대의 눈을 보면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야기하고 싶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김대중이 받은 것은 거절의 답이었다.

“남편과 박정희 대통령은 생전에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1968년 청와대에서 열린 신년 하례식이었지요.” 김대중은 전해 총선에서 ‘전쟁’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치열한 싸움 끝에 국회의원에 재선된 터였다. 김대중과 박정희는 선 채로 인사하고 그 자리에서 5분 정도 이야기를 했다. 김대중은 “그때 박 대통령은 나에게 무척 친절했고 내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그 만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희호는 박정희의 공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보릿고개를 이겨내고 경제발전을 이끌었다는 공적이 있어요. 하지만 장기독재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인권을 유린한 것은 공보다 훨씬 큰 허물입니다.” 김대중도 비슷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우리나라가 어느 정도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것도 공적이다. 그러나 독재정권이어야만 경제를 잘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 없다.” 박정희가 쿠데타 뒤 추진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장면 민주당 정권이 세운 계획을 베껴서 내놓은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대기업에 특혜를 주어 재벌경제체제를 만들었고, 정경유착이라는 악성종양을 키웠다. 중소기업을 대기업에 종속시켰고 노동자들을 저임금에 묶어놓았다. 농촌에 새마을운동을 일으켰지만 농촌 몰락의 속도는 줄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의 저곡가 정책은 농민을 대도시로 떠밀었고 도시빈민으로 만들었다.

“지역분열은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가장 나쁜 유산이었어요. 경상도를 우대하고 전라도를 차별했는데, 이것은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비호한 것만큼이나 큰 잘못이었지요. 박정희 정권은 전라도를 지역개발이나 인재등용에서도 차별했지만, 문화적으로도 차별했어요.” 박정희 집권기에 방송 드라마나 영화에서 도둑·사기꾼은 대부분 전라도 사투리를 썼다. 반면에 경상도 남자는 씩씩하고 사내다운 모습으로 묘사됐다. 그런 차별은 박정희 정권이 끝난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됐다. “민주주의를 하고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얼마든지 산업화를 이룰 수 있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를 발전시킨다면서 너무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요.”

박정희를 저격한 김재규는 10월27일 0시20분께 체포됐다.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다. 비상국무회의는 그날 새벽 4시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으로 정승화를 임명했다. 전두환은 박정희 암살 사건을 수사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11월3일 박정희의 국장이 치러졌다. 11월6일 전두환이 텔레비전에 등장해 10·26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때 처음으로 전두환 장군 얼굴을 보았는데, 왠지 모르게 살기가 느껴져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어요. 함께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도 표정이 굳어졌어요.” 김재규는 이듬해 5월 사형당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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