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집회의 자유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조치를 금지한다"

이범준 기자 입력 2015. 11. 28. 15:28 수정 2015. 11. 2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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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권 막으려는 정권의 시도 국내외 대부분 위헌으로 판결

“헌정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오랜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거쳐 왔고, 또 남북분단이라는 특이한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침해가 유독 심했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최근까지도 시위의 자유가 집회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는 기본권인지의 여부가 문제되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시위 또는 행진 등의 문제는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따라 법적 문제로 비화해 왔기 때문에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오랫동안 수많은 위헌 논란과 법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공권력의 시위 내용 간섭을 불허”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0년 법제처가 발행한 헌법주석서에 나오는 구절이다. 헌법재판소 연구관 출신이면서 보수성향의 법조인으로 평가 받는 이석연 당시 법제처장이 추진해 펴낸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헌법학자들이 참여한 헌법 해설서인데, 집회와 시위를 억압하려는 것은 대한민국 독재정권의 악습이라고 지적했다. 대한민국의 역대 정권은 집회와 시위를 억압하려고 시도하고 법률로도 만들었지만, 헌법재판은 이를 번번이 위헌으로 폐지시켰다. 집회와 시위는 인간의 기본권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난 11월 14일 물대포 사건 이후 정부는 시위를 통제하려 외국의 예를 들고 있다. 이를 두고 현상의 일부를 과장해 전체 맥락을 왜곡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오히려 집회·시위를 규제하려는 유럽연합 회원국 일부의 시도는 헌법재판소에서 줄줄이 위헌을 선고 받고 있다. 2014년 2월 스페인의 한 노동조합이 7차례 집회신고를 했는데 정부 대표부 하엔주 지부가 금지했다. 같은 내용으로 이미 36번이나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위헌을 결정하면서 “공권력이 시위의 내용에 간섭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더구나 시위의 목적에는 시위대 간의 의견교환, 시민들의 참여 요구 등도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2012년 2월 독일 드레스덴 산림공동묘지에서 제2차 세계대전 드레스덴 폭격 희생자 추모행사가 있었다. 그런데 주변에는 행사에 반대하는 사람 3명이 “애도할 것이 없다. 저지할 것만 남아 있다. 국민공동체는 필요 없다”고 적힌 펼침막을 들고 있었다. 경찰은 펼침막을 말아 넣도록 하면서 3명에게 과태료 150유로를 부과했고, 법원도 인정했다. 이 판결에 대해 독일 헌법재판소가 위헌을 결정했다. “공동묘지가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면 사회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이 토론되는 장이었다. 법원은 집회라는 기본권을 행사한 것이 어째서 공공질서에 반하고 처벌까지 했는지 논증해야 한다.”

프랑스 판사들은 2007년 12월 법복 차림으로 형사법전을 불태우며 시위를 벌였다. 당시 프랑수아 사르코지 정부는 인구변동과 급증하는 법률수요에 비해 사법제도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며 법원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반대로 판사들은 파업까지 벌였다. 이러한 유럽의 예를 정부는 다른 맥락으로 인용한다. 최근에 논란이 된 복면금지 법안도 마찬가지. 독일의 복면금지법은 국수주의나 전체주의 성향이 짙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며, 프랑스의 경우 이슬람 신자들의 종교 상징이라며 히잡 등을 제한하지만 논쟁 중이다. 어쨌든 우리처럼 익명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의도는 없다.

2003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 앞서 8개국 정상의 종이 가면을 쓴 시위대들이 세계화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가면쓰기는 전 세계에서 하고 있는 오래된 시위방식이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집회의 자유 간섭 모든 조치 금지” 다행히 대한민국 사법부는 집회·시위를 방해하는 공권력의 시도를 저지하고 있다.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다른 집회를 막으려 먼저 신고한 집회는 본질이 가짜이므로 다른 사람이 시위를 해도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피고인 김모씨는 2009년 6월 남대문경찰서에 서울시청 광장에서 4대강 사업 저지 집회 신고서를 냈다. 하지만 남대문경찰서는 같은 일시·장소에 먼저 신고된 집회가 있다며 집회 금지 통고서를 보냈다. 사실은 바르게살기운동 서울시협의회가 신고한 것인데, 개최한 적은 없었다. 김씨는 예정대로 집회를 열었고, 검찰은 집회시위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권순일 대법관이 주심이던 대법원 소부는 벌금 200만원이 선고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 합의부로 돌려보냈다. “먼저 신고된 집회의 참여 예정인원, 집회의 목적, 집회 개최장소 및 시간 등 먼저 신고된 집회의 실제 개최 가능성과 양 집회의 상반 또는 방해 가능성 등을 확인해 먼저 신고된 집회가 다른 집회의 개최를 봉쇄하기 위한 허위 또는 가장 집회신고에 해당함이 분명한 경우에는, 먼저 신고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뒤에 신고된 집회에 대해 집회 자체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

헌법재판소의 집회·시위에 관한 보장 판례는 무수하다. 2013년에는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시위를 금지한 긴급조치에 위헌을, 2011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당시 시청 공원을 둘러싼 경찰 차벽에 위헌을, 2003년에는 외교기관 경계 100m 이내 시위 금지를 규정한 조항에 위헌을 선고했다. 특히 이런 결정을 내리면서 집회·시위의 자유가 무엇인지 명시했다. “국가가 개인의 집회 참가행위를 감시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 집회에 참가하고자 하는 자로 하여금 불이익을 두려워하여 미리 집회 참가를 포기하도록 집회 참가의사를 약화시키는 것 등 집회의 자유행사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조치를 금지한다.” 대검찰청 공안부장 출신의 주선회 재판관이 2003년 작성한 결정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돌이켜보면 사법기관은 헌법정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9년 9월 집회시위법 10조 야간 옥외집회 금지조항이 헌법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하고도 헌재는 단순위헌을 선고하지 못했다. 폐지하면 24시간 시위가 벌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2010년 6월까지 법을 살려둘 테니 국회가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적당히 알아서 새롭게 제한을 하라는 것이었다. 입법기관이 아닌 헌재가 법을 만들지는 못하니 촉구를 한 것이다.

국회는 손을 대지 못했고 법조항은 사라졌다. 하지만 정작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한 헌법재판소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2010년 6월 전후로 재판관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조항이 사라지면 난리가 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 일이 없었고 재판관들만 머쓱해졌다. 그러면서 단순위헌으로 폐지해도 됐는데 엉뚱한 걱정과 상상을 했다는 자책이 있었다. 일부 재판관들은 우리가 세상을 몰랐다고도 했다.” 헌법은 정권의 것도 헌재의 것도 아닌, 시민의 것이다.

<이범준 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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