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을 가장 잘 아는 정치인, 김상현이 기억하는 YS는?

양김을 가장 잘 아는 정치인, 김상현이 기억하는 YS는?

2015.11.23. 오후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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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현, 전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앵커]
한국 현대사의 반세기를 장식했던 양김 시대가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양김에 대해서 이분만큼 잘 아는 분이 있을까 싶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DJ 의동생이라고 불렸었고요. 1983년 민주화운동을 위한 민추협을 결성할 때 그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 가 있었고 그래서 DJ를 대신해서 YS 김영삼 전 대통령과 공동의장 대행을 맡았었고 그러나 정작 87년 대선 때는 YS를 지지했었던 그 자신도 6선 의원을 지내면서 한국현대사의 큰 족적을 남긴 정치인입니다.

김상현 전 의원을 저희가 초대했습니다. 어서오십시오. 안녕하십니까. 건강 괜찮으시고요?

[인터뷰]
좋습니다.

[앵커]
먼저 소식 들으시고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사람이 태어나면 한번 누구나 다 세상을 떠나지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떠나셔서 너무 황당하고 슬펐습니다.

[앵커]
최근에는 만나본 적이 없으시죠?

[인터뷰]
한 1년 동안은 못 뵀어요.

[앵커]
1년 정도요? 아, 그 전에는요?

[인터뷰]
그 전에는 1년에 두세 번씩 꼭 저녁을 모시고 꼭 했죠.

[앵커]
그러셨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1년에 한두번씩 저녁을 모시고 정대철 의원하고 저하고 신상우 의원 이렇게 셋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모시고 덕담도 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앵커]
어쨌건 그래도 김상현 고문님도 그렇고 정대철 고문도 그렇고 동교동계, 범 동교동계인데 이렇게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

[인터뷰]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은 그런 걸 그렇게 구애받지 않아요. 어떤 면에서 포용력이 커요. 전혀 그런 게 없습니다.

[앵커]
그러면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초청을 해서 만나신 겁니까, 아니면 후배들께서 만나자고 해서 만나신 겁니까?

[인터뷰]
저희가 초청을 해서 만난 것이 더 많죠.

[앵커]
그렇군요.

[인터뷰]
한번은 또 김영삼 대통령이 저희하고 만나자고 해서 만나기도 하고.

[앵커]
보통 만나시면 어떤 음식을 드십니까?

[인터뷰]
한정식집에서 주로 식사를 많이 했습니다.

[앵커]
칼국수 아니고요?

[인터뷰]
칼국수 아니고.

[앵커]
예, 그렇죠.

[인터뷰]
그렇죠.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 좋아하는데 정대철 고문이나 저는 칼국수를 안 좋아해요. 먹으러 가자고 해도 안 갔을 거예요.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신 것은 젊은 시절에 만나게 돼서 의형제처럼 지내셨고 그래서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저희가 잘 알고 있는데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신 것은 언제쯤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인터뷰]
가까이에서 만난 것은 제가 65년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당선이 돼서 국회에 입성후에는 가까운 곳에서 자주 뵙죠. 그 전에도 야당을 하면서 만나기도 했지만 그렇게 가까이에서는 만나지 못 했죠.

[앵커]
65년이면 김영삼 대통령께서 27년생이시고 김 고문님은 35년생이니까 30대인가요?

[인터뷰]
제가 만 29살 때 국회에 들어갔으니까.

[앵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님께서도 30대였겠군요. 30대, 아주 젊은 정치인일 때 만나신 거군요. 그때 첫인상이 어땠습니까?

[인터뷰]
미남이시고 아주 호감이 있는 그런 이미지상이었죠.

[앵커]
같은 당이었나요?

[인터뷰]
처음에는 당이 달랐습니다. 제가 처음에 입당할 때는 저는 민중당이라고 그때 박순천, 김대중, 소수정당이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한당이었습니다.

[앵커]
그래서 좀 이야기도 나눠보시고 하셨나요?

[인터뷰]
그럼요.

[앵커]
어떤 정치인구나라는 생각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내가 보기에는 다정다감한 정치인이다.

[앵커]
성품이 다정다감하나요?

[인터뷰]
네. 그렇습니다.

[앵커]
저희가 듣기로는 말도 좀 직설적으로 하시고 좀 강하고, 어조도. 다정다감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요.

[인터뷰]
정치를 할 때는 단호하고 그렇지만 평소에는 유머가 많으세요.

[앵커]
그리고 다정하게 말을 하시고.

[인터뷰]
다정하게 이야기도 많이 하고요.

[앵커]
그렇습니까?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정치적인 둥지가 된 것이 민주화 운동을 하는 민추협 단체...

[인터뷰]
84년도 민추협을 결성할 때 그때는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만날 때도 있었습니다.

[앵커]
어떻게 해서 민추협을 김영삼 전 대통령과 같이 하시게 된 건가요?

[인터뷰]
그 당시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으로 망명을 가 있었고 국내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계시다가 그 당시 아주 암울했던 시기에 정국이 적막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23일간의 단식투쟁을 해 가지고 소위 야권들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을 격려하고 또 중지하라고 우리가 찾아 뵈면서 얘기를 해 가지고 뭔가 야권의 정치단체를 하나 결성하자, 이렇게 이야기를 해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저와 합의를 해서 소위 말해서 상도동계와 동교동계가 합의를 해서 민추협을 그때 84년도 5월 18일에 출범을 하게 됐죠.

[앵커]
저 사진 조금 전 보여드렸는데요. 양김하고 그러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신해서 공동의장 대행을 맡으신 거고 어찌보면 양김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런 정치인이신데 그때 김영삼 전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같이 일을 해 보시니까 잘 호흡이 맞던가요?

[인터뷰]
포용력이 크고. 특히 저를 공동의장으로서 추대한다고 하니까 상도동계 예를 들면 최형우 의원이라든가 김동영 의원이 어떻게 우리 총재님과 어떻게 같은 위치느냐, 그럴 수 있느냐 해서 김영삼 총재한테 항의를 하고 그런 모양이에요.

그거 가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신경 쓰지 말라고. 그런 거 없다고. 그래서 김영산 전 총채가 김 최고위원을 설득해서 공동의장으로 됐죠.

[앵커]
김동영, 최형우. 좌동영, 우형우. 사실 그렇게 하기가 쉬운 게 아닌데요.

[인터뷰]
그럼요.

[앵커]
연배가 7년 아래고 급도 낮은데.

[인터뷰]
말할 것도 없죠.

[앵커]
고문님, 이 사진을 제가 아까 봤는데요. 이 사진이 같이 김영삼 전 대통령 그 옆에 고문님이시죠? 저게 어떤 사진입니까?

[인터뷰]
저것은 3선 개헌 때 반대 때... 개헌반대 시위한 그런 모양인데요?

[앵커]
지금 그 옆에 장준하 선생님입니까?

[인터뷰]
네, 장준하 선생입니다.

[앵커]
역사적인 사진이군요.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역사적인 현장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YS, DJ 두 사람 사이에 경쟁 의식, 라이벌 의식이 있었죠?

[인터뷰]
있었죠.

[앵커]
어떤 것을 보면서 느끼셨습니까?

[인터뷰]
그 당시에 이제 YS는 정치인으로서 상도동계에서 특히 세력이 강했어요. 그래서 원내총무선거 때도 김영삼 후보가 원내총무가 되고 경합의 대상이 되지 않았어요.

대통령 후보, 40대 기수론. 그 당시만 하더라도 김대중 후보는 지지세력이 없고 누구나 보더라도 일반 언론계에서도 YS가 후보가 된다. 90% 된다고 생각을 하고 모든 언론도 모든 신문에 조간, 석간이 나왔는데 YS 후보, 확정적 이렇게 다 나왔죠. 그렇게 했는데 2차 투표에 들어가서 뒤집어져서 김대중 후보가 역전승을 해서 후보가 됐었죠.

[앵커]
72년, 71년인가요?

[인터뷰]
71년이요.

[앵커]
71년이요. 그러니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내가 더 먼저 했어야 되고 내가 당연히 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니까 조금 그때부터 뭐랄까 경쟁심리가 더 발동했을 수도 있겠어요.

[인터뷰]
그렇죠. 김대중 후보측을 조금 무시하는 그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앵커]
그때도 김 고문님께서는 DJ을 도우셨죠?

[인터뷰]
저는 DJ를 지원했고요.

[앵커]
연배는 1살 더 위죠, 김대중 대통령이.

[인터뷰]
김영삼 대통령보다요? 그렇습니다.

[앵커]
1살 차이고. 그러면서 어떤 보이지 않는 신경전, 때로는 감정적인 그런 것들이 있기도 했습니까?

[인터뷰]
그렇습니다.

[앵커]
어떤 좀, 소개해 주실 만한 대목이 있습니까?

[인터뷰]
크게 소개할 것은 없는데 하여튼 두 분은 아주 멀고도 가까운 그런 아주 대립적인 관계가 계속해서 진행되어 왔죠.

[앵커]
나중에 세월이 지난 다음에 두 분이 하신 말씀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YS는 너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해라고 하셨다고 하고 YS는 DJ는 쉬운 일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해라고 하셨하던데.

[인터뷰]
그런 비슷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앵커]
많이 다르죠, 두 분이?

[인터뷰]
성격이 다르죠.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굉장히 치밀하고 사무적이고 YS는 대단히 포괄적이고 아주 결단력이 있고, 과감하고 이런 점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성격이 다릅니다.

[앵커]
그러다 보니까 같이 일하면 잘 안 맞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그랬겠어요.

[인터뷰]
그런 게 있어요. 그때 직선제 개헌 추진하는 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100만 서명운동하자고 하니까 YS가 웃으면서 100만인이 아니고 1000만명 해야 된다. 그래서 1000만명 서명운동을 했는데 그렇게 과감한 성격이에요.

[앵커]
그러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1000만명 말도 안 되는 것인데 1000만명을 하자고 하니까.

[인터뷰]
어렵다고 하는데 YS는 하면 된다는 것이고.

[앵커]
그런데 실제로 1000만명을 서명운동을 할 수 있습니까?

[인터뷰]
되는 데까지 했죠.

[앵커]
하여간 두 분이 그래서 서로 장점과 단점이 다른 것이고 때로는 협력을 해서 민주화를 이루기도 했고요. 87년 대선 때 결국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네.

[앵커]
그런데 DJ의 오른팔인줄 알았던 김상현 고문께서 YS를 지지했단 말입니다. 그때 저도 생각이나 거든요, 기사가 나서 봤던 기억이 나거든요.

[인터뷰]
그때 저는 양김을 제가 개인적으로 방문을 해서 양김이 후보를 단일화하지 않으면 만약에 두 분이 다 나오면 노태우 후보를 당선시키는 1등공신이 김영삼, 김대중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단일화를 해야 된다고 얘기를 했거든요.

만약에 저는 단일화 안 되면 양김이 노태우 대통령을 탄생시키는 일등공로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대중 선생이 그 당시에 우리당을 탈당하고 네가 눈물로 호소했거든요. 그래서 탈당하기를 저는 따라가지 않고 민자당에 그냥 남았죠. 남아서 같이 있다가 그분이 후보가 되고 저는 총재 권한대행으로 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탈당을 안 하고 그냥 남아있었던 거죠.

[앵커]
DJ가 당시에 탈당했던 거는 그냥 통일민주당 안에 있었으면 당내 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겁니까?

[인터뷰]
김대중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데 저는 경선해 보면 알 수 없다고 봤거든요.

[앵커]
알 수 없다.

[인터뷰]
설혹 지는 한이 있더라도 후보단일화가 돼야 하고 단일화가 실패하는 것은 한국정치사 민주역사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는 것이고 우리나라의 지역감정 최악의 사태를 만드는 게 그 당시 후보 단일화 실패가 오늘 날까지 심화되고 있는 지역갈등이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앵커]
그래서 그때 나는 안 따라가겠다라고 김대중 전 대통령한테 말씀을 드렸더니 뭐라고 하시던가요?

[인터뷰]
안 따라가겠다고 하는 말도 제대로 못 했죠, 제가 안 따라갔죠.

[앵커]
말을 안 하셨다고?

[인터뷰]
저는 만약 탈당을 하고 가신다면 저는 안 가겠다, 그 말씀을 드렸지만 탈당한 이후에 만나서 제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앵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뭐라고 일언반구도 없으셨나요?

[인터뷰]
아무 말씀도 없었습니다.

[앵커]
아무 말씀을 안 하셨고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는 고마워 했겠는데요? 그때?

[앵커]
뭐라고 하시던가요?

[인터뷰]
나중에 다 끝나고 정말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고 저를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앵커]
그런데 선거는 결국 두 분 모두 당선이 안 되지 않았습니까?

[인터뷰]
당연히 노태우 후보가 당선이 되는 거죠.

[앵커]
그러다가 90년에 그 뒤로 90년 3년 뒤에 3당 합당을 할 때 YS 김영삼 대통령을 안 따라가셨더라고요. 그때도 같은 이유입니까?

[인터뷰]
같은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을 해 왔는데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과거 군부세력하고 야합하는 것은 그것은 정도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을 하고 반대를 했어요.

[앵커]
대도무문인데 대도가 아니다.

[인터뷰]
아니다. 그렇게 반대를 하고 전당대회에서 제가 강력히, 그 당시에 노무현과 저와 아주 강력하게 반발하고 아주 성토를 했죠. 그러나 강행을 해서 결의를 해서 통합으로 갔죠.

[앵커]
그때 김영삼 전 대통령께서는 뭐라고 설득하거나 뭐라고 안 하시던가요?

[인터뷰]
워낙 우리가 강하게 나오니까 설득할 생각도 못 했죠.

[앵커]
그래서 그때 사이가 안 좋아지셨겠는데요?

[인터뷰]
네.

[앵커]
그 다음에 한참 안 보셨습니까?

[인터뷰]
그동안 얼마 동안 안 보다가 또 다시 보게 되고 그러죠, 정치라는 것이 가까이 있다가도 멀어지고 멀었다가 가까워지고.

[앵커]
한국정치사의 굴곡. 그 역사 현장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92년에 양김이 다시 맞붙었단 말입니다, 대선에서. 그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하셨죠?

[인터뷰]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했죠. 그 당시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민주연합이라고 해서 신당 창당을 할 때 그때 제가 참여를 해서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습니다.

[앵커]
한때는 등을 돌렸던 사이인데 그때 다시 만나겠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던가요, 김대중 대통령이?

[인터뷰]
저는 환영한다고 했죠.

[앵커]
감정은 조금 상하셨나요?

[인터뷰]
속으로 상했겠죠.

[앵커]
그렇지만 내색은 안 하시던가요?

[인터뷰]
네.

[앵커]
어떤 분입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더 오래 본 거는 김대중 대통령인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어떤 정치인이라고 생각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아주 조직적이고 사무적이고 빈틈없는 정치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인간적으로는요?

[인터뷰]
인간적으로는 포용력이... 김영삼 대통령에 비해서는 포용력이 좀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포용력은 김영삼 대통령이 더 크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앵커]
역량은 그러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더 높다라고 보십니까?

[인터뷰]
역량을 평가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하여튼 뛰어난 정치적인 역량이 있는 분은 김대중 대통령이고 김영삼 대통령은 하여튼 포용력과 결단력은 정말 탁월한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앵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지만 어쨌든 그분들의 길은, 기른 양성한 후배정치인들이 여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고 그래서 그 양대산맥이 화해하고 화합하고 하기를 많은 국민들이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또 많이 진전이 됐고요.

오늘은 이희호 여사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에 찾아와서 조문을 했다고 합니다. 조금 전에 화면이 들어왔는데 잠깐 보여드리면서 김 의원님의 말씀을 계속 듣겠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건강하시죠?

[인터뷰]
네, 건강하세요.

[앵커]
지금 박지원 전 원내대표도 같이 있고요. 오늘 오후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 자신의 남편, 평생 라이벌 숙적이었던 그러나 또 협력자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손명순 여사와 이희호 여사 두 분이 같이 계시는군요.

저 두 분의 사이는 어땠습니까? 손명순 여사와 이희호 여사요.

[인터뷰]
잘 만난 일이 없으니까요.

[앵커]
가끔 이렇게 공식석상에서 마주치거나 그런 것은 없죠?

[인터뷰]
그런 정도죠.

[앵커]
아시는 대로 손명순 여사도 건강 상태가 아주 좋지는 않고요. 지금 김현철 차남을 비롯해서 유가족들 만나고 위로하는 그런 모습들을 봤습니다. 아마 이런 모습들을 국민들께서 보시는 것 자체가, 지금 뒤에 의원들하고 또 둘째 아들도 같이 왔고요.

그래서 2세들끼리 서로 위로를 하고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현대사의 거목들이 이렇게 한 분씩 우리 곁을 떠나는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만감이 교차하시겠는데요.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인터뷰]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은혜를, 호의를 베풀고 사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구나 사람은 죽는 거니까 죽기 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살아야 된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김 고문님, 만약에 지금 격동의 역사 현장들, 양김과 함께하셨던 그 순간순간들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아, 이 순간에는 내가 이렇게 그때 다시 돌아간다면 이렇게 하겠다. 선택을 이렇게 해 보겠다라는 후회되거나 아니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해 보고 싶은 그런 게 있으십니까?

[인터뷰]
저는 만약에 다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그와 같은 상황이 오면 저는 후보단일화를 위해서 끝까지 했을 것이고 또 군부와 야합을 반대했을 것이고 후회는 없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는 실패를 했지만 아주 정도를 걸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앵커]
6선 의원을 지내셨고 당대표 권한대행 최고위원도 하셨는데 실패라고는 할 수 없지 않지 않습니까?

[인터뷰]
그러나 당대표를 한 번도 못했으니까.

[앵커]
못해 보셨습니까? 당 대표를 해 보고 싶었는데.

[인터뷰]
네.

[앵커]
마지막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셨을 때요. 1년여 전에 그때 같이 식사를 하실 때 그때 뭐라고 하셨던 말씀중에 기억나는 말씀이나 또는 장면이나 기억나시는 거 있습니까?

[인터뷰]
특별히 기억나는 거는 없는데 이 양반이 항상 하는 말이 전투에는 실패하더라도 전쟁은 이겨야 한다. 아주 의미 있는 얘기죠. 전투 10번해도 전쟁에 이겨야 되지 전투를 10번 이기고 전쟁 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저한테 그런 얘기를 했어요. 아주 저는 저에게 기억이 남고 아주 정치인들에게 교훈이 됩니다.

[앵커]
어떤 의미로 해석하셨습니까?

[인터뷰]
그거는 뭐냐하면 사사건건 이기려고 하지 말고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그리고 투쟁하더라도 상대방이 물러날 길을 생각하면서 투쟁을 해야 된다. 서구의 전술용어에 이런 얘기가 있어요.

도망가는 적에게는 황금의 다리를 줘라. 오히려 적을 완전히 포위하면 적도 사생결단해서 피해가 많아집니다. 그런데 적에게 퇴로의 길을 열어주고 싸우는 것이 아군의 시선을 줄이는 것이다, 이런 얘기죠. 이런 것을 하나 우리가 현재 우리 지금 새누리당이나 새정치민주연합이나 정치인들이 참고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앵커]
그런 것이 오히려 양김시대보다도 오히려 지금 더 못한 것 같기도 싶고요.

[인터뷰]
못합니다.

[앵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청년 시절 성적표와 졸업증서 그걸 저희가 구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한번 보시죠. 국민들, 시청자 여러분들께도 보여드리려 저희가 준비를 했습니다. 서울대 철학과. 결혼식 때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아, 그게 아니고 졸업식이군요. 서울대 철학과 졸업식 때 사진이고요. 졸업증서와 성적표가 있더라고요. 참 젊을 때 미남이셨네요, 정말. 서울대 철학과 경상남도 거제 출신이고 1927년생 이렇게 돼 있습니다.

과목 수가 굉장히 많네요. 저 성적표가 다. 최초의 서울대 출신 대통령이기도 했고요, 우리나라에서요.

[인터뷰]
그렇죠.

[앵커]
졸업증서 경상남도 김영삼 이렇게 돼 있고 국립서울대학교 물리과를 졸업했다는 졸업증서입니다. 오늘 김상현 전 의원, 김상현 고문과 함께 양김시대를 추억해 봤습니다.

앞으로도 그 지혜들을 후배 정치인들한테 계속해서 잘 전수해 주셨으면 좋겠고 건강하십시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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