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들하들 면발에 미소가 스르르

안동/글·김성윤 음식전문기자 2015. 11. 12.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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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칼국수 '안동 커넥션'.. 안동을 가다 서울 간 안동국시 콩가루는 빠지고 얇은 麵은 그대로

서울 돈암동 한적한 골목에 숨어 있는 '밀양손칼국수' 주인이 막 끓여낸 칼국수를 커다란 사발에 담아 냈다. 하들하들한 국수를 들어 올리자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왔다. 후루룩 빨아올린 면발은 연인의 입술처럼 다정하게 부드럽고 관능적으로 매끄럽다. 소 양지와 사태, 사골로 끓인 국물은 구수하면서도 시원하다. 차가워진 바람에 굳은 몸이 배 속부터 따뜻하게 풀어지는 기분이다. 미소가 스르르 입가에 번진다. 법가(法家)에서는 국수를 '스님을 미소 짓게 만든다'는 뜻으로 승소(僧笑)라고 부른다는데, 스님이 아니라도 그 매력에 빠지기에 충분한 음식이 바로 칼국수이다.

서울 성북동 일대에는 유난히 칼국수집이 많다. 이 동네 칼국수집들은 칼국수 면발이 얇고 가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음식강산' 1권에서 한반도 전역의 국수문화를 소개한 음식칼럼니스트 박정배씨는 "국수를 뜻하는 경상도말 '국시'를 상호(商號)로 쓰는 것만 봐도 혜화동 칼국수 뿌리는 경북, 그중에서도 안동"이라고 말했다. 이곳뿐 아니라 과거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불려가 칼국수 끓이는 법을 가르친 '소호정'도 안동국시를 계승했음을 자랑스레 내세운다. 안동의 칼국수는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서울로 전해졌을까. '칼국수 안동 커넥션'을 캐보기 위해 경북 안동으로 달려갔다.

◇안동국수는 '건진국수'와 '누름국수'

경북 안동 예미정(禮味亭)에 도착하자 이정숙(68)·최갑란(69)씨가 누름국수를 만들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미정은 안동의 종가(宗家) 음식을 맛보고 체험할 수 있도록 안동시가 마련한 공간. 예미정 종가음식상설시연장 반장인 이정숙씨는 "안동국수는 건진국수와 누름국수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건진국수는 면을 삶아 찬물에 헹궈 대바구니에 건져놨다가 시원한 국물에 다시 말아 낸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누름국수는 다른 지역 칼국수처럼 면을 삶은 육수에 그대로 말아서 내는 제물국수다.

국수 반죽은 일반 밀가루 반죽보다 노르스름했다. 이씨는 "콩가루를 섞는 게 안동국수의 특징"이라고 했다. "건진국수나 누름국수나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국수 반죽을 만드는 건 같아요. 계절이나 날씨, 그날그날의 습도에 따라 다르지만, 밀가루와 콩가루를 2대1~3대1 정도로 섞지요. 안동에선 예부터 콩 농사를 많이 했어요. 그래서 무슨 음식이건 콩가루를 넣지요."

이정숙씨와 최갑란씨가 미리 준비한 반죽을 안반(두껍고 넓은 나무 판)에 놓고 기다란 홍두깨로 밀기 시작했다. 홍두깨와 반죽에 밀가루를 뿌리고 밀고 펴기를 수십 차례 반복했다. 밀가루 반죽이 말 그대로 종잇장처럼 얇게 펼쳐졌다. 안반의 나뭇결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최갑란씨는 "안동국수 만들 때 가장 어려운 과정"이라고 했다. "시어머니가 얇을수록 국수가 맛있다고 하셨지요. 양을 늘리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어요. 잔칫날 손님이 들어오시면 '손님 한 사람 들어옵니더. 한 번 더 밀어주소'라고 외치기도 했지요."

이씨와 김씨는 반죽에 밀가루를 뿌려가며 몇 겹으로 접은 다음 도마에 올려놓고 칼로 썰었다. 손으로 써는 게 맞나 싶을 만큼 국수 폭이 좁고 일정했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많이 칼국수를 만들어 먹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국수 문화 발달은 '봉제사 접빈객' 덕분

안동 김씨 종가에서 태어난 김기희 호산대 식품조리과 겸임교수는 "안동에서 국수 문화가 발달한 건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때문"이라고 했다. 유서 깊은 종가가 수두룩한 안동에서는 집집마다 제사가 많았고, 자연 집을 찾는 손님들로 북적댔다. 조상과 손님을 잘 모시기 위해 과거 귀하고 비쌌던 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대접했다.

옛날에는 제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고운 밀가루를 얻기 힘들었다. 그래서 대청마루에 병풍을 펼쳐놓고 한지를 깐 다음 절구로 빻은 밀가루를 부채질해 날려 가루를 얻는 정성을 들였다. "가장 멀리 날아간 가루가 1등품, 그 다음은 2등품, 가까이 떨어진 가루가 3등품으로, 건진국수는 1등품 가루만 모아 반죽을 했지요."

건진국수 육수에는 은어(銀魚)를 사용했다. 매년 여름이면 부산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안동으로 올라오는 은어는 비린내가 없고 수박 향이 나서 '수중군자(水中君子)'라고도 불린 민물 생선이다. 안동 양반집에서는 이 은어를 잡아 말려뒀다가 건진국수 국물 내는 데 사용했다. 김 교수는 "면 삶은 육수와 따로 두었던 육수를 반씩 섞는 것도 안동 건진국수의 특징"이라고 했다.

예미정에서는 요즘 구하기 어려워진 은어 대신 마른 멸치와 다시마 등을 사용해 국물을 냈다. 여기에 준비해뒀던 국수를 넣고 펄펄 끓여서 그릇에 담고 지단 따위 꾸미를 얹어 누름국수를 준비했다.

안동 누름국수는 입술에 닿을 때 촉감이 밀가루로만 만든 국수보다 훨씬 매끄러웠다. 달걀로 반죽해 밀어 뽑는 이탈리아 생(生) 파스타와 비슷했다. 씹을 때마다 콩가루 향이 구수하게 올라왔다. 쫄깃함은 일반 칼국수보다 덜 했다. 좋게 말하면 더 부드럽지만, 나쁘게 말하면 뚝뚝 끓기는 느낌이었다. 모두 콩가루를 섞어 생기는 특징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면이 덜 불었는데, 미리 준비해뒀다가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누름국수에 콩가루를 섞게 된 이유인 것으로 짐작됐다.

안동시 삼산동 '선미식당'은 안동에서 칼국수를 처음으로 메뉴로 내놓은 식당이다. 많은 안동 사람은 "집에서 해먹을 수 있는 음식을 왜 식당 가서 사먹겠느냐"며 의아해했지만, 주인 김옥주(76)씨는 올해로 41년째 식당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6000원짜리 '칼국수조밥'을 주문하면 국수에 조밥과 반찬까지 10여 가지나 딸려 나와 황송할 정도다. 면발은 얌전하고 멸치 국물은 투명하게 맑은 건진국수 스타일이다. 안동에서 국수를 파는 식당은 대개 이곳처럼 건진국수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형태의 국수를 내고 있다.

◇분식 장려와 함께 태어난 서울의 칼국수 명가

박정희 정부는 1969년 분식을 장려하기 위해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을 '분식의 날'로 정했다. 바로 그해 성북동에 '국시집'이 문을 열었다. 이름부터 국수의 경상도 사투리인 국시인데다 수육과 삶은 문어, 생선전이라는 경상도 잔칫상의 전형적인 메뉴를 칼국수와 함께 판다는 점에서도 경북 안동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 집뿐 아니라 '혜화칼국수' '손칼국수' '명륜손칼국수' '밀양손칼국수' 등 일대에 있는 식당들은 비슷한 상차림을 갖추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국시집에서 일하다가 독립하거나 다른 이에게 비법을 물려주면서 비슷한 가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혜화칼국수가 생선전 대신 생선튀김과 석쇠에 물기 없이 구운 '바싹불고기'를 내는 등 집집마다 칼국수와 함께 곁들여 먹을 수 있는 '사이드 메뉴'를 조금씩 다르게 해 개성을 살리고 있긴 하다.

성북동 칼국수집들이 맛집으로 유명해지면서 인파가 몰려 번잡한 반면, 성신여대입구역 태극당 뒷골목에 있는 밀양손칼국수는 옛날 국시집의 한적하면서 정성 들여 만든 음식으로 대접 받는 느낌이 남아 있다. 이 식당에서 칼국수 만드는 장면을 지켜봤다.

칼국수 면발을 얇고 가늘게 써는 건 안동식 칼국수와 같다. 하지만 콩가루는 섞지 않는다. 이는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 칼국수 비법을 알려준 '소호정'도 마찬가지다. 콩 풋내를 선호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 데다가, 콩가루를 섞으면 아무래도 밀가루로만 반죽할 때보다 쫄깃한 맛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국물도 안동이나 대구 등 경상도에서 칼국수에 흔히 쓰는 마른 멸치가 아니라 소 양지·사태와 사골을 섞어서 뽑는다. 그 이유로 밀양칼국수 주인 박일남씨는 "더 맛있게 만들려고 그런 거지"라고 했다. 김기희 교수는 "칼국수를 상품화하면서 고급·비싸다는 인식이 있는 소고기로 대체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안동에서 흔히 먹는 건 누름국수. 안동식 누름국수는 국수를 삶은 육수에 그대로 먹는 제물국수 스타일이다. 반면 밀양손칼국수에서는 커다란 냄비에 주문이 들어온 만큼씩만 국수를 넣고 끓여낸 다음, 그릇에 담고 국수를 끓인 육수와 사용하지 않은 육수를 반씩 섞었다. 안동 건진국수 방식을 계승한 셈이다. 이렇게 하면 면에서 전분이 배어 나와 국물이 걸쭉하고 텁텁해지는 제물국수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다.

서울 성북동 칼국수와 안동국수는 이렇게 비슷한 듯 다르게, 시대와 지역에 맞게 칼국수 면발처럼 유연하고 탄력 있게 적응하며 발전하고 있었다.

안동 칼국수집 & 여행정보

예미정: 건진국수, 메밀묵, 배추전 만들기 무료 체험 가능하다. 건진국수 5000원, 맷돌두부김치 8000원, 청포묵 탕평채 1만원 등을 내면 맛볼 수도 있다. 종가 요리법을 고수하되 현대인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코스 상차림도 있다. 예코스 3만원, 미코스 5만원, 정코스 7만원. (054)841-3416, yemijeong.com

선미식당: 칼국수조밥·들깨국수조밥 6000원, 수육 1만원 (054)857-8498

촌동네식당: 칼국수·묵밥 6000원 (054)822-7989

구름에: 전통 한옥이 근사한 호텔로 변신했다. 고택(古宅) 정취는 유지하되 화장실·목욕탕·추위 등 불편을 해소했다. (054)823-9001, www.gurume-andong.com

서울 칼국수집

밀양손칼국수: 칼국수 6000·7000원, 수육·전 2만2000원, 문어 3만원, 반반 2만5000원 (02)924-7107

혜화칼국수: 국시 8000원, 수육 1만5000·2만8000원, 생선튀김·바싹불고기 1만5000·2만8000원 (02)743-8212

명륜손칼국수: 손칼국수 7000원, 수육·문어 3만원, 생선전 2만5000원 (02)742-8662

소호정(본점): 국시·국밥 1만원, 수육 3만2000·4만2000원, 전 2만6000·3만1000원, 참문어 3만1000·3만6000원 (02)579-7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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