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부 성폭행' 덮는 허위 탄원서.."엄마·동생 힘들까봐"

박용하 기자 2015. 11. 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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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14·가명)는 2013년 여름 ‘놀이동산에 놀러갔던 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지혜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다음날 놀이동산에 갈 예정이었던 지혜는 설레는 맘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새벽이 되자 계부 김모씨(40)가 이불 속으로 다가왔다. 3년 전 어머니와 결혼해 같이 살던 김씨는 이날 처음 지혜의 몸에 손을 댔다. 고통스러운 새벽을 보낸 뒤 지혜는 놀이동산에 가야 했다.

김씨는 지난 3월까지 약 2년에 걸쳐 지혜를 수차례 성폭행한 죄로 재판에 넘겨졌다. 2013년 여름날의 범행은 지혜가 13세 미만의 시기여서 가장 중한 죄목이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지만 지혜는 수사기관에서 처음 당한 날의 기억을 또렷이 진술했다. 지혜는 “놀이동산에 놀러가는 날이었기에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6월 지혜는 수사기관에 ‘아빠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냈다.

지혜는 “초등학교 때 피해를 입은 것은 거짓말이고, 중학교 1학년 여름에 첫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또 “그간 당한 게 화가 나 중한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거짓말을 꾸며냈다”고도 했다. 법정에 나와서는 “성폭행 시도는 많이 했으나 실제 한 적은 없었다”며 계부를 두둔했다.

지혜의 진술이 번복되자 재판부는 고민에 빠졌다. 지혜가 그간 일관되게 첫 피해를 입은 날을 이야기했기에 나중에 낸 탄원서와 진술의 배경이 의문스러웠다.

그때 재판부의 눈에 띈 것은 지혜 가족의 상황이었다. 당시 지혜의 친모 ㄱ씨는 계부 김씨와의 사이에 아들(5)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ㄱ씨는 탄원서를 내며 “혼자 딸과 아들을 키우는 것은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지혜는 “난 계부를 안 보고 살아도 되지만 남은 동생과 엄마는 힘들 것 같다”면서 “이 글을 쓰는 것도 싫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지혜가 가족의 어려움 때문에 허위 탄원서를 낸 것으로 결론내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김우수 부장판사)는 김씨의 13세 미만 미성년자간음죄 등을 인정해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지혜처럼 미성년자 성폭행 피해자들이 가족 등 주변 상황으로 인해 진술을 번복하거나 허위로 탄원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의붓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16살에 출산까지 한 ㄴ양은 재판 도중 의붓아버지와 혼인신고까지 했다. 친모가 의붓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서울해바라기센터’의 신진희 변호사는 10일 “외국의 경우 피해자가 진술을 번복할 때 판사들이 피해자를 법정 밖에서 만나 그 배경에 대해 파악해 보는 사례도 많다”면서 “필요한 경우 피해자 아동을 친모나 가족들로부터 분리시켜 별도로 의사를 확인해 보는 등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박용하 기자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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