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저녁 서울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열린 ‘연세치의학 100주년 기념식’에 특별한 손님이 초대됐다. 제임스 맥안리스 선교사의 손자 스티븐 맥안리스(71)씨 부부였다.
맥안리스 선교사는 1921년부터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세브란스병원(현 연세대 의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치과 진료와 치과의사 양성에 헌신하다 1941년 신사참배를 거부해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스티븐은 초창기 의료선교사 활동 모습이 담긴 기록 영상을 보며 “얘기로만 듣던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직접 접하니 감격스럽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빛바랜 사진 속 옛날 한국의 모습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발전한 한국을 보니 놀랍다”고 했다.
맥안리스 선교사는 한국 땅에 서양 치의학을 도입하고 기틀을 세운 선각자 3인 중 한 명이다. 치과의사 출신 선교사 윌리엄 쉐플리는 1915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와 세브란스병원에 치과학교실과 치과진료소를 처음 개설했다.
1885년 세워진 첫 서양식 의료기관 제중원에서도 치과 진료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호러스 알렌 등 일반 의사 출신 선교사들이 한 것이었다. 치아 보존, 보철 치료 등 치과 전문 진료와 교육이 이뤄진 것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이 시초였다.
맥안리스 선교사는 1921년 쉐플리의 뒤를 이어 동료 선교사 J L 부츠와 함께 부임했다. 교수로 재직했고 1939년 3대 치과 과장을 맡았다. 연세대 정갑영 총장은 8일 “맥안리스 교수는 한국인을 선발하고 수련시켜 우리나라 치의학 교육을 이끌어갈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했다. 그의 제자 이유경 정보람 이양숙 등은 국내 치의학계 지도자로 성장했다.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인 치의학 교육을 못마땅해 한 일제는 41년 신사참배 거부를 빌미로 맥안리스 선교사를 강제 추방했다. 그는 이후 필리핀 등지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다 미국에 돌아갔고, 평범한 치과의사로 살다 1979년 세상을 떠났다.
스티븐은 “할아버지는 한국인과 김치를 매우 사랑하셨다. 크리스마스마다 가족 모임에 한국 음식이 3분의 1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우리는 늘 ‘그랜드 마더(grandmother)’를 한국말로 ‘할머니’라고 불렀다”고 했다.
맥안리스 선교사의 한국 사랑은 대를 이었다. 치과의사였던 아들 도널드는 6·25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참전해 세브란스병원에 구호품을 전달하기도 했다. 스티븐은 “아버지(도널드)는 열여섯 살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한복 입고 찍은 사진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건강이 나빠졌을 때 ‘한국에 꼭 다시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그는 끝내 한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2004년 눈을 감았다.
스티븐 부부의 한국 방문은 같은 동네 사는 재미교포 그레이스 김(한국명 김인실·62)씨의 도움이 컸다. 지난해 연말 모임에서 맥안리스 선교사의 헌신 얘기를 들은 김씨가 ‘후손이 한국 방문을 원한다’는 이메일을 지난 9월 연세대 치과대학에 보내면서 성사됐다. 김씨는 “1920년대 어려운 시기에 한국에 와서 근대화를 도운 분들의 헌신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연세대 이근우 치과대학장은 “한국전쟁 때 근대 치의학 사료가 거의 불타 사라졌다. 특히 맥안리스 교수나 후손과는 70년 넘게 연락이 끊겼고 관련 기록조차 부족했다”면서 “스티븐의 증언과 기록물은 소중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스티븐 부부는 1920년대로 추정되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현재 서울역 인근 위치) 전경 사진과 일기장, 편지 등 희귀 자료를 연세대에 기부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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