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히 쌓인 외로움을 녹여주는 라자냐와 바바(Bava)

2015. 10. 22.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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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구적 미식가 정수지기자의 EAT, DRINK & WRITE] ⑫

그렇게 모두 떠났다.

사람은, 특히 나란 인간은 왜 한치 앞도 못 보는 지. 그 많은 송별회에 가면서도 몰랐다. 꽤 오래 전 10월, 혼자 남았다. 아니, 혼자 남은 걸 깨달았다. 주말이면 만나 보드 게임을 하고, 와인을 마시던 친구들, 같이 장을 보고, 수시로 문자를 주고 받던 친구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해외로 나갔다. 입으로만 웃던 내게 눈으로 웃는 법을 알려준 친구들이었기에 마음은 더 허전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별다이어트(?)로 기성복에선 맞는 옷이 없을 정도로 살이 내렸다.

아프고 아름다웠던 그 가을을 견디기 위해

추억에 대한 강한 집착을 좀 덜어내면 살 수 있을 거 같아 다른 일들에 시선을 돌렸다. 분야에 상관없이 많은 책을 읽었고, 집 근처 허브 농장을 발견하곤 거기서 시간을 보냈다. 음악도 닥치는 대로 들었다. 유행가 가사처럼 사는 건지 아니면 그래서 유행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당시엔 트로트 가사마저 가슴에 와 박혔다. 무릎이 시큰할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대개는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불쑥 더 그리워지고 추억이 또렷해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땐 고통에게 따졌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혼자 남겨지는 것이 가장 무서운 내게 왜 이 상황이 온 거냐고. 우리가 만나고 헤어질 때 마다 나눈 서로의 껴안음이 그리워 종종 스스로를 꽉 끌어 안으며 근근 버텼다.

그 해 가을은 아마 기분 때문인지 더 아름다웠던 거 같다. 늦가을, 비에 젖은 흰 빛 가로등을 붙들고 퇴근 길 한바탕 울었다. 그 순간, 혼자일 때와 타인 앞에서 나는 울음엔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책에서 봐서 무심코 썼던 단어의 정확하거나 숨겨진 의미를 뒤져보는 습관도 이 때 생겼다. 그리고 이듬해 홀로 떠난 여행지, 낯선 이들 사이에서 뜨는 해를 보며 또 지는 해를 보며 하루를 울었고 그곳에 그 마음을 놓고 일상의 나로 돌아왔다.

여행 후 텅 빈 내 마음에 들어온 건 동네엔 이상한 울음 소리를 내는 새가 있다는 거, 공원 산책길에 보이던 할머니가 어느 날부터 안 보인다는 사실, 곧 재건축 할 어느 아파트 단지의 아름다운 은행 나무, 날씨에 따라 다른 바람 냄새, 얼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의 뒷모습, 걸음 걸이, 그리고 사진처럼 스치는 그들의 손이 담겼다. 손으로 뭘 할 수 없을까 고민하다 오랜 관심사인 요리 공부를 시작했고 자연히 와인을 접하게 되었다.

혹독한 훈련과 노동을 겪진 않았지만, 요리를 하면서 깨달은 건 ‘절대 서둘지 말고 해치우듯 하지 말고 끝내 잘 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요리의 한 과정을 망치면 완성품을 위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하듯 피하고 싶은 고통의 순간도 끝내 겪어내야 한다. 그러면 다시 겪을 일이 없거나 혹여 다시 반복된다 해도 일상의 나로 돌아오는 일이 수월해지거라 믿게 됐다. 살았기 때문에 느끼는 고통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끝나지 않을 와인 이야기를 들으며 ‘과정에 충실한 사람이 되자’는 인생 최초의 결심도 했다. 그제서야 해외에 나간 친구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감당한 외로움과 어려움이 느껴졌고, 미처 짐작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 때때로 한국에 다니러 와 같이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마치 지난 주말 만난 사람처럼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현악기처럼 다가온 와인, 바바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지금은 단조(Minor Key, 短調)적 인간으로 살며, 대부분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큰 감정 기복이 없이 지낸다. 그래도 심리전문가들을 그걸 꿰뚫어 보는 지 ‘그러고 어떻게 지내. 드라이브 해줄 테니 울기라도 해. 내가 말없이 운전할게’라 다독이시는 분도 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많이 힘들고 생각이 많아 질 땐 늘 첼로 소품을 틀어 놓곤 한다. 악기는 잘 모르지만 첼로 소리는 늘 심장 소리에 가장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어느 날 와인매장에서 본 현악기가 그려진 바바(Bava) 와인들은 저절로 기억됐다. 그리고 때론 따끈한 요리를 하고, 와인 잔을 채운다. 마치 친구들과 있을 때처럼 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왔고, 10월도 왔다. 그리고 목이 잠길 정도로 외로움이 차오르는 중이다. 자신 있는 메뉴 중 하나인 라자냐를 떠올랐다. 소고기, 당근, 양파, 셀러리, 토마토가 든 라구 소스, 버터와 밀가루로 루를 만든 뒤 데운 우유를 넣은 흰 베샤멜 소스, 그리고 버터에 볶아내 다진 시금치를 라자냐 면과 함께 층층이 쌓아 파슬리 가루를 섞은 그라노 파다노 치즈를 뿌려 오븐에 구워냈다. 라구 소스를 만들 땐, 오레가노, 올스파이스, 파슬리, 바질, 세이지를 넣었고, 베샤멜 소스엔 넛맥을 넣었다. 토마토의 신맛을 잡기 위해 단맛이 있는 마르살라를 조금 넣어 산미를 둥글려 완성했다.

바바(Bava)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와인 명가로 지역 대표 품종 ‘바르베라’ 최고 생산자다. 바바는 포도원과 와인셀러에서 음악회를 개최하며 포도와 와인에 음악을 담는다. 그리고 와인 스타일에 맞게 현악기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오’, ‘비올론첼로’, ‘콘트라베이스’를 와인 레이블에 새겼다. 그리고 와인들은 레이블 속 악기와 같은 표현력을 지닌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바르베라 품종에 입 맛을 들이는 중이다. 피에몬테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품종, 생동감이 있고, 늘 마시기 좋은 상태이며, 가격 접근성이 좋은 와인이지만 말이다. 보랏빛에 가까운 진한 색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바디, 딸기 혹은 새콤한 체리 맛, 가벼운 타닌과 높은 산미는 조화롭지 못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바의 바르베라들은 다르다. 바르베라의 수확량을 현저히 낮춰 좋은 송이를 얻은 뒤 현대적인 양조 과정을 거친 바바 바르베라 다스티 리베라(Bava Barbera d’Asti)와 플래그쉽 와인 스트라디바리오(Stradivario)는 큰 울림과 장기 숙성력을 갖는 맛있는 와인이다.

프랑스 오크통 숙성을 거친 바바의 바르베라는 라벤더, 말린 찻잎, 향 내음, 넛맥, 아니스 등의 향신료 향에 말린 붉은 열매와 간간히 느껴지는 검고 작은 열매 향을 지녔다. 입에서는 풀 바디에 놀랍도록 절제된 타닌, 산미, 알코올 그리고 오크 풍미를 지니고 있다. 잘 익은 검붉은 과실 풍미에 산미는 풍부하지만 소화하기 좋은 모습으로 느껴져 음식, 그것도 풍미가 진하고 기름진 음식에 무척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다. 바바 리베라는 이탈리아어로 자유를 뜻하며, 상대적으로 더 싱그러운 느낌이, 스트라디바리오는 중후하고 기품 있으며 여운이 주는 공명이 큰 와인이다.

시간이 많이 들지만 라자냐를 만들어 먹으면, 텅 빈 마음 타령이니 외로움이니 하는 것들은 마음에서 작아진다. 라자냐의 쌓인 단면을 자르고 뿜어져 나오는 열기와 풍미를 음미한 뒤 입 안에서 노곤하게 부서지며 뒤섞이는 소스들을 즐기면 정말 맛있다. 여기에 진한 보랏빛에 체리와 자두 풍미를 지닌 바바의 바르베라 와인을 흘려 넣으면, 어느새 입 안은 축제 현장이 된다. 요리에 사용한 향신료와 와인의 향이 겹치며 큰 시너지를 내는 모습이 놀랍다. 날씨가 선들 해지며 혹시 고독을 즐기다가 외로워졌거나, 계절성 우울증이 찾아오거나 하면, 마음 맞는 사람들과 뜨끈한 라자냐에 바바를 곁들여보시면 어떨지. 텅 빈 가슴 바바로 채워바바. Cheers!

TIP) 바바 스트라디바리오와 바바 리베라는 어디에서?

바바 스트라디바리오와 바바 리베라는 전국 신세계 백화점, 롯데백화점 와인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백화점 기준 소비자 가격 바바 스트라디바리오는 20만원, 바바 리베라는 5만 5천원

/ 와인21 정수지기자(suziewang@naver.com) : 학구적 미식가. 네이버 블로그 ‘수지왕의 Food & Wine Pairings’를 운영하고 있으며, 와인21 와인전문기자이다. 아시아 와인트로피, 베를린 와인트로피 심사위원, 중앙일보-와인나라 공동주최 와인컨슈머리포트 전문 패널로 활동 중이며, 월간 우먼센스, 수퍼레시피 등 칼럼 기고, 기업 블로그 게스트 블로거, 와인 강사, 와인 통역, 와인 세미나 보좌 등을 해오고 있다.

장소 협찬_소리샵 청담 (www.sorishop.com / 02-3446-7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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