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국정교과서] 재난에 쓰일 돈으로 '국회 심의' 우회

박홍두·정원식 기자 2015. 10. 20.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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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교과서 예비비' 논란

정부가 천재지변 등의 경우에 활용하는 예산 예비비 편성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 ‘속도전’을 노골화했다. 예산안 심의를 고리로 한 야당의 국정화 반대를 아예 무력화시키며 밀어붙이기에 나선 것이다. 국회 예산심의권을 우회한 것이라 적법성 논란도 불거졌다.

정부는 특히 국정화 행정예고와 함께 예비비 편성을 추진한 것으로 20일 밝혀졌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미리부터 작정하고 준비해 군사작전하듯 몰아친 것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허를 찔린 야당은 예비비 편성이 국가재정법 위반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주먹 쥐고 대화 새누리당 김무성(오른쪽),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20일 서울 중구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 개막식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예비비는 예산을 먼저 쓰고 난 뒤 이듬해 5월31일까지 국회에 사용명세서를 제출하고, 이에 대해 결산심사를 받아 승인을 얻으면 된다. 일반 예산과 달리 국회 심의 없이 정부 의도대로 쓸 수 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예산의 국회 심사를 피해 가는 ‘우회로’를 택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야당은 위법성을 제기했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예측할 수 없는 예산 외의 지출 또는 예산 초과 지출에 충당하기 위해’ 예비비를 쓸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교과서 국정화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는 자연재해 등의 피해를 당했거나 큰 사고가 나서 국가적인 예산 소요 필요성이 있을 때 주로 예비비를 이용해 왔다. 올해 국회에서 의결된 지난해 결산심사보고서를 보면 예비비로 사용된 2조2500억여원이 대부분 집중호우 피해복구비, 세월호 사고 수습 비용, 교황 방한 경호비 등에 이용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예비비가 일단 쓰고 나중에 국회 심의를 받는 예산 사용방식이라는 점에서 정부가 국회의 예산심의권까지 무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 이춘석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국민적 저항 때문에 당당하게 국가 본예산으로 할 수 없으니까 위법한 꼼수를 쓴 것”이라고 비판했다. 교육부 관계자도 예비비 신청이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는 점을 인정했다.

정부의 ‘국정화 속도전’에 대해선 ‘군사작전식 몰아붙이기’라는 비난이 나왔다. 정부는 지난 12일 교과서 국정화 행정예고 고시 발표 다음날 국무회의를 통해 예비비를 의결했다. 국민 의견을 20일간 수렴하겠다고 했지만 교육부는 일부 예산을 이미 교과서 집필을 담당한 국사편찬위원회에 배정하고 제작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새정치연합 이언주 원내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정부가 예비비를 몰래 비공개 의결한 것은 전형적인 날치기 수법”이라며 “국민들의 국정화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황우여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의 위증 논란도 제기됐다. 황 부총리는 지난 9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아직 여론 수렴 중이고 국감을 마치고 결정하겠다”고 했다. 새정치연합 안민석 의원은 “13일 예비비가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면 국감 당시쯤엔 교육부가 기획재정부에 이미 예산 신청을 했던 때일 것”이라며 “황 부총리의 발언은 위증”이라고 지적했다.

<박홍두·정원식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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