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욱, 공허함 품고 싹 틔운 자신감 (인터뷰①)

백초현 기자 2015. 10. 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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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스타) 백초현 기자 = 연극 ‘트루웨스트’는 형제의 재회로 시작된다. 사막에서 돌아온 형 ‘리’는 맥주를 홀짝이며 동생에게 말을 건다. 동생 ‘오스틴’은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하며 형의 질문에 답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며 보이지 않는 경계의 눈초리를 보낸다. 초반 극을 감싸는 불편한 공기는 형제가 떨어져 지난 세월만큼 무겁게 관객을 짓누른다.

‘트루웨스트’는 2년 만에 돌아와 관객과 만나고 있다. 작품은 미국 극작가이자 배우인 샘 셰퍼트가 1980년에 쓴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2010년 ‘무대가 좋다’ 시리즈로 초연됐을 당시에는 배우 오만석과 조정석, 배성우, 홍경인 등이 무대에 올랐다.

배우 이현욱이 뉴스1스타와 만나 연극 ‘트루웨스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 News1star/ 악어컴퍼니

이번 공연에서 배우 이현욱은 극 중 동생인 ‘오스틴’ 역을 맡았다. “오스틴은 다 가졌지만 속은 텅 비어 있어 연민이 간다”라고 말한 그와 함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오스틴은 30대 시나리오 작가로 형 리와는 달리 반듯한 외모의 소유자다. 그는 풍부한 경험보단 평범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큰 콤플렉스를 갖고 있다. 이현욱은 “저와 색깔이 맞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오스틴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압축력도 저와 비슷했다”고 맡은 역을 설명했다.

“‘트루웨스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불쌍하지만 그중 오스틴에게 가장 연민이 가요. 오스틴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명 성공한 삶을 살고 형 리보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안정적이지만 가족의 행복이라든가 안정감, 소통에서는 결핍이 존재하죠. 그것을 갈망하는 크기도 형과 차원이 달라요.”

이현욱은 연민을 자아내는 오스틴을 표현하기 위해 골몰했다. 원작을 읽고 관련 영화를 보며 오스틴의 정서에 한걸음 다가갔다. 영화를 볼 때는 배우의 연기를 보기보단 형제의 분위기와 그들이 만들어낸 공기 등에 초점을 맞췄다. 그럼에도 고민은 쉬이 끝나지 않았다.

배우 이현욱이 오스틴 역을 연기하기 위해 고민한 것들을 이야기 했다. © News1star/ 악어컴퍼니

“오스틴이 술에 취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한껏 망가져 관객에게 웃음을 줘야 할까, 아니면 오스틴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할까. 저는 후자를 택했어요. 오스틴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집중했고,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니 웃음도 자연스럽게 따라오더라고요. 그래도 여전히 고민은 많아요.”

‘트루웨스트’를 이끄는 주요 캐릭터는 형 ‘리’와 동생 ‘오스틴’이다. 두 사람은 긴밀하게 호흡을 주고받으며 극의 긴장과 이완을 책임진다. 이번 공연에서는 배우 김준원과 전석호, 서현우가 리로 분했고, 오스틴 역에는 이현욱 외에도 김선호와 문성일이 함께했다. 이현욱은 오스틴을 연기하는 배우 중 유일하게 세 명의 리와 연기 호흡을 맞췄다. 그가 바라본 리는 어떤 모습일까.

“김준원 배우의 리는 강한 척 하는데 나약해서 매력이 있죠. 그래서 더 안아주고 싶어요. 전석호 배우의 리는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겠어요.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리에요. 서현우 배우의 리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다 드러나 버린 느낌이에요. 인상 자체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떠도는 것 같아 불쌍해요.”

3인 3색의 리와 만날 때 이현욱은 그에 맞춰 각기 다른 오스틴을 꺼냈다. 김준원과 붙을 땐 안쓰럽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전석호와 호흡을 나눌 땐 그가 무슨 행동을 할 지 몰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서현우 앞에서는 두렵고 무서운, 그러면서도 안타까운 눈빛을 내비치는 오스틴을 그려냈다.

배우 이현욱 리 역을 연기하는 배우들과의 호흡에 대해 이야기했다. © News1star/ 악어컴퍼니

‘트루웨스트’에는 리와 오스틴 형제 외에도 엄마, 그리고 사울키머가 등장한다. 특히 엄마는 극의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알래스카로 여행을 떠난 엄마는 극 초반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대화 속 엄마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구름처럼 두둥실 떠다니다 별안간 무대에 등장해 관객을 당황하게 한다. 엄마의 등장은 극의 흐름을 한순간에 바꿔놓는다.

“엄마는 오스틴 삶의 중심 그 자체였어요. 오스틴은 엄마가 원하는 것들을 지켜오다 보니 FM적인 삶을 살게 됐죠. 엄마 말대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보니 엄마 인생도 별게 없는 거예요. 거기서 오는 허탈감은 이로 말할 수 없을 정도죠. 그래서 엄마에게 소리를 지르고 벗어나려고 해요. 동시에 오스틴은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것을 불안해해요.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틴은 카펫 안에서 머물고 흐트러진 물건을 정리하며 엄마가 만들어 놓은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유지해요. 엄마가 떠난다고 했을 때 ‘여기 있어요’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이죠.”

엄마가 등장한 순간 무대 위, 그리고 객석에는 섞일 수 없는 두 개의 공기가 공존한다. 이질감은 관객만이 느끼는 불편함이 아니다. 이현욱은 “융화될 수 없는 분위기가 맞아요. 공감도 안 되고 동의할 수도 없죠”라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이어 “엄마가 내뱉는 말에 오스틴은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때로는 웃음이 새어 나올 때도 있어요”라고 엄마의 등장에 반응하는 오스틴을 설명했다.

“오스틴은 엄마가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여기서 뭐하세요?’라고 물어요. 관객들은 그 순간 웃음을 터트리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웃지 못하죠. 엄마의 행동 자체가 오스틴을 미쳐버리게 하거든요. 엄마 캐릭터에 대해서 많은 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배우 이현욱이 연극 ‘트루웨스트’ 출연으로 얻은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 News1star/ 악어컴퍼니

극 중 엄마는 피카소를 만나러 가야겠다며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야”라고 부르짖는다. 리와 오스틴 역시 마찬가지다. 인물들은 저마다 기회를 잡기 위해 무언가에 집착하고, 매달리며 끄트머리까지 내달린다.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그것이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현욱은 ‘트루웨스트’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며 기뻐했다. 그는 “전에는 연기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가 없었어요. 나에 대한 불확신이 가득했죠. 이 작품을 통해 용기를 얻었어요”라고 털어놨다.

“자신감을 가질 만한 성격이 아니에요. 당근을 많이 먹으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달콤한 말에 빠질까봐 경계하고, 자신을 깎아내렸어요. 그러지 않고도 충분히 저를 사랑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말이죠. 이 작품을 하면서 자만이 아닌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어요. 그동안 자신감이 있어도 그것을 부정했는데 이제는 달라졌죠.”

이현욱의 변화는 ‘트루웨스트’ 탑승과 함께 시작됐다. ‘트루웨스트’가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것도 좋은 자양분이 됐다. 이현욱은 “관객들이 많이 웃어주면 좋은 기운을 받아서 재미있게 극을 끌고 간다. 반대로 그날 관객 반응이 안 웃는 쪽이면 정극모드로 딥(Deep)하게 들어가게 되더라”고 두 가지 버전을 두고 무대에 오른다고 밝혔다. 선택취사는 관객의 몫. 그는 관객 반응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극의 흐름을 타고 오스틴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처음 무대에 오르던 날 이현욱은 떨리기보단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고. 그는 공연이 끝나고 나서는 무대에서 어떻게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극에 빠져들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별 사고 없이 첫 무대를 마쳤다. 2달여간 달려온 여정은 이제 곧 종착역에 도착한다.

“공연이 끝난다는 것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슬슬 준비해야겠죠? 아쉽긴 해도 아쉬워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에요. 너무 아쉬워하면 스스로가 힘들 것 같아요. 공연하면서 좋은 기운도 얻었고,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확신도 생겼어요.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poolchoya@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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