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에도 쉴 틈 없는 아내.. 리모컨 끼고 빈둥대는 남편

채지은 2015. 10. 17.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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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Cover Story] 가족갈등 키우는 불평등한 가사분담

집안일은 여전히 여자 몫전통적 性역할 64%가 반대해도, 맞벌이 남편 집안일 고작 41분

그마저 "한 번 도와준다"는 식… 남자는 열외식 명절풍습도 한몫

“남녀가 평등한 가정? 눈 씻고 찾아봐도 내 주변에는 없네요.”

결혼 전 더없이 자상하던 남자가 돌변했다는 푸념은 아이를 낳고 육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그야말로 폭발 직전의 스트레스로 바뀐다. 퇴근 후 집안일, 아이 뒤치다꺼리에 분주한 아내의 시선을 무시하고 당당히 소파에 등을 붙이고 누워 TV 시청이나 스마트폰 게임만 하는 남편을 볼 때마다 결혼생활에 회의를 느낀다는 은행원 이모(35)씨. 결혼 2년 차인 이씨는 “남편이 먼저 퇴근해도 멀뚱히 기다릴 뿐 밥을 할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며 “2세를 계획 중이지만 내 장래가 암담한 것 같아 고민”이라고 말했다.

남성의 가사 참여도가 전보다 나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도와준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게 남편들의 인식이다. 보험사 직원 정모씨(36)는 “솔직히 와이프가 시키기 전에는 설거지나 쓰레기 버리기도 모른 척한다”고 했다.

▦가사 육아는 여전히 여자 몫

통계청의 ‘2014년 생활시간조사 결과’에 따르면 가사분담 만족도 부문에서 여성은 29.9%만 만족한다고 답했다. 남성(35.4%)보다 만족도가 훨씬 낮다. 스트레스 지수 역시 높을 수밖에 없다. 여성 51.4%가 가정생활에서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답했다. 남성보다 12.5%p 높은 수치다. 또 미혼여성보다 기혼여성이 19.4%p나 더 높았다. 그만큼 가사나 육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크다는 방증이다.

일하는 여성, 맞벌이부부가 늘면서 전통적인 성 역할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라졌지만 가사분담 변화는 사실상 미미하다. 우리나라 성인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하루 평균 47분.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느라 분주한 시기인 25~39세 남성의 가사 시간은 평균보다 겨우 2분 더 많다. 반면 같은 연령대 여성은 4시간9분으로, 5배나 길다. 5년 전 조사와 비교해도 남자는 고작 5분 늘고, 여성은 9분 줄어든 데 그쳤다. 맞벌이와 외벌이 부부의 시간활용을 보면, 맞벌이 남편의 가사노동시간은 41분으로 오히려 외벌이 남편(46분)보다도 적었다.

가사뿐 아니라 육아에서도 남편은 보조적 역할에 그친다. 김모씨(39ㆍ여)는 최근 두 아이가 폐렴에 걸려 4박 5일간 병실을 지켜야 했다. 부부 모두 올해 휴가를 모두 소진한 상황이라 더 휴가를 낼 수 없어 회사에 어렵게 양해를 구하고 아이 간호를 했다. 김씨는 “‘엄마가 있는데 왜 아빠가 병간호를 하느냐’는 인식이 팽배해 남편은 회사에서 말도 못 꺼내겠다고 하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명절 노동 구조가 문제다

가정 혁명을 이루려면 명절 때 노동 구조부터 바꿔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 집안에서 여성과 남성 영역이 분리되어 있던 낡은 관습이 이 시기에 특히 심하게 지켜지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부엌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남성 스스로 가사를 내 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회사원 윤모(36)씨는 “추석 연휴 1박2일 동안 전을 부치고 술상 밥상 차리기를 무한반복 하는 동안 남편은 누워서 TV만 봤다. 시댁식구들 누구 하나 수고했단 말 한마디 없고, 종이 따로 없었다”며 “울화통이 터져 남편한테 설거지라도 하라고 했더니 그래 봐야 당신만 욕 먹는다며 웃어넘기더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남성과 똑같이 공부하고 일하도록 요청 받으며 자란 신세대 며느리라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개선을 요구하면 싸가지 없다는 낙인만 찍힐 뿐이다.

젊은 층에 부는 변화의 바람男 청소 女 빠래 식 분담 늘어… 요리하는 남자 열풍 등도 영향

"해줄게" 대신 "내가 할게" 필요

▦차츰 변하는 부부 역할 인식

‘경제활동은 남자, 집안일은 여자’라는 전통적인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의식은 젊은 층을 중심으로 희석되고 있기는 하다. 올 가을 결혼을 앞둔 조모(36)씨는 예비신부에게 가사분담을 약속했다. 요리는 일찍 퇴근 하는 사람이 하고, 화장실 청소는 조씨가 하기로 했다. 조씨는 “퇴근이 늦어 요리를 얼마나 하게 될지 몰라도 나머지 일은 되도록 성실히 이행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조성은 한국건강가정진흥원 본부장은 “방송의 셰프 열풍이나 요리하는 남성이 증가하는 것도 집안일에 대한 남성의 의식 변화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통적 성 역할에 대해서는 64.3%(통계청 자료)가 반대할 만큼 대부분 불합리하다고 생각해 변화는 급속도로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또 경제활동에 적극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 구조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10~30대 여성, 대졸이상, 미혼에서 전통적 성 역할에 대한 반대 경향이 강하다.

지금의 사회구조에서 가사노동을 온전히 여성에게만 책임 지우는 것은 결혼생활에 심각한 갈등 요소가 될 수 있는 반면 아버지가 가사 분담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지난해 미국 심리과학 학회지에 실린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심리학 연구진 논문에 따르면 아버지가 집에서 요리나 설거지 빨래 등 집안일을 많이 하는 집에서 자란 딸은 여성에 대한 벽이 높은 의사나 경찰, 회계사, 과학자 등 다양한 장래 희망을 꿈꿀 가능성이 높았다.

김은희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가정에서의 남녀평등은 단순히 관련 정책이나 제도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라며 “가부장적 의식의 변화와 더불어 가정을 소홀하게 만드는 기업환경의 전환, 가족이 있는 삶에 대한 의미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채지은기자 cj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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