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기자의 싱글노트]화엄음악제, 이것은 힙스터 공연이 아니다
10일 밤 전남 구례군 화엄사의 각황전 앞 특설무대에 선 에비안. 화엄음악제 제공 |
‘힙스터’의 사전적 정의다. 지난주 술자리에서 지인들과 ‘힙왕’(힙스터 왕)의 조건을 토론했다. 서울 구도심의 무너질 듯한 건물에 숨은 1980년대식 술집이 요즘 가장 ‘힙’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진정한 힙스터의 공간이라면, 맛없고 직원도 불친절하지만 어떤 면에서 별난 분위기가 있는 장소, 범인(凡人)이 (아직은) 잘 알지 못하는 곳이어야 한다는 데 좌중의 준엄하지만 반쯤은 농담인 의견이 모아졌다.
얘기는 이번(지난) 주말, 어떤 음악축제에 가야 가장 ‘힙’해질까로 옮아갔다. 성대한 규모의 두 축제를 제치고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서 열리는 화엄음악제 정도는 가줘야 대중음악계 힙스터를 자처할 수 있다는 게 우리 결론. 보통 대중음악 팬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고풍스러운 분위기(‘희귀할 것!’), 왕복 8시간 이동해 산속에서 3시간 공연을 봐야 하는 압박감(‘불편할 것!’)이 ‘힙왕’의 조건을 더할 나위 없이 충족시키는 듯해 보였다.
10일 아침, 화엄사로 향했다. 지리산의 악천후를 대비해 패딩 점퍼까지 챙겨 입었다. 대웅전을 오른편에, 국보 제67호 각황전을 전면에 둔 산사 마당에서 하늘 이고 관람하는 공연은, 아아, 힙스터고 뭐고 정말 특별할뿐더러 좋기까지 했다.
피아니스트 토마스 슐츠는 존 케이지(1912∼1992)의 (말로만 듣던) 혁명적인 곡 ‘4분 33초’를 연주했다. 연주자가 피아노 뚜껑을 열고 손목시계를 보면대에 풀어 놓은 뒤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안 하는 작품. 지리산의 영험한 기운과 객석의 휴대전화 카메라 셔터 소리가 합쳐지며 침묵은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작품이 됐다. 힙스터 레벨 상승.
페르시아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은 디마 엘사예드의 구음과 국악 듀오 숨의 연주도 밀도 높았다. 에비안은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베이스 클라리넷의 빠른 분산화음에 광인 같은 즉흥 보컬을 더한 이바 비토바는 공연 막판, 속세를 떠나는 까마귀처럼 양팔을 훨훨 저으며 ‘깍! 깍!’ 소리를 냈다.
1200년 역사의 각황전 표면에 3D 프로젝션 매핑(3차원 영상 투사·고전과 첨단이 만나면 힙스터 레벨이 급상승한다)이 연꽃을 피우고 우주의 별을 쏟아내는 장면은 대단했다.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했다. 내 선언은 이렇다. 이것은 힙스터 공연이 아니다. 이것은 ‘공연’이다. 내년에 또 가고 싶다. -구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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