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의 낯뜨거운 '상고법원 올인'

김정우 입력 2015. 9. 21. 04:49 수정 2015. 9. 21.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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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중앙홀 이례적 대관 녹화

청소년 퀴즈 프로그램 '골든벨'에 가정법원장이 나와 관련문항 출제

찬성 유도 여론조사에 광고까지

"위헌성 논란 등 풀린 게 없는데 의원입법 몰아가기는 부적절"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전경. 김주성기자

"이것은 3심제에서 2심 판결에 불복해 마지막 단계인 대법원의 심리를 신청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법 해석의 통일과 가치 기준 제시에 관한 사항은 대법원에서, 개인적 권리 구제에 관한 사항은 이것 법원에서 심리하는 내용의 법안이 현재 국회에 발의된 상태이기도 한데요. 이것은 무엇일까요?"

'제1회 대한민국 법원의 날'(9월 12일)을 기념해 13일 오후 7시 10분 방영된 KBS 1TV 청소년 서바이벌 퀴즈 프로그램 '도전! 골든벨'의 34번 문제 설명이었다. 정답은 다름 아닌 '상고'. 이날 방송사 측은 일반 상식과 한국의 사법 시스템 등으로 구성된 전체 50개 문항 가운데 유독 상고법원과 관련한 34번 문제만 여상훈 서울가정법원장이 직접 출제자로 나서도록 배려했다. 당시 자녀와 함께 TV를 봤다는 한 법조인은 "아무리 대법원이 상고법원 설치에 목매달고 있다고 해도 학생 대상 프로그램까지 이용하는 걸 보니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혀를 찼다.

방송 녹화가 진행된 서울 서초동 대법원 중앙홀은 웬만해선 외부 행사에 대관을 안 해주는 곳이다. 법원 관계자는 "서울가정법원 주도로 프로그램을 기획해 원래는 양재동에 있는 가정법원 청사를 녹화 장소로 잡았는데, 예상 외로 대법원이 선뜻 대관을 허락해 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사법부가 최근 상고법원에 대한 우호적 여론 조성을 위해 사활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도전! 골든벨' 같은 인기 방송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것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축에 속한다. 상고법원 찬성 답변을 유도하는 여론조사를 실시하거나 지방자치단체에 홍보를 지원해 달라는 민원을 했다가 논란이 일기도 했다. 양승태호(號) 대법원의 최대 역점 사업인 상고법원 신설이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유죄 확정 판결 이후 야당의 비협조 기류로 관련 법안의 국회 통과가 불투명해지자 사법부가 무리수를 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억지 홍보' 논란에 휘말린 부산고법의 상고법원 관련 설문조사도 그 중 하나다. 부산고법은 "시민 1,000명한테 물어보니 응답자의 85%가 상고법원 추진이 필요하다고 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이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부산변호사회가 "문항 자체에 상고법원 도입 필요성을 강조한 다음에 찬반을 묻는, 공정하지도 않았던 조사"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망신을 샀다. 특히 '85%'라는 수치는 상고법원에 대해 '알고 있다. 필요하다'(29%)와 '모른다. 필요하다'(56%)를 합한 것이어서 지나치게 자의적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15일 전주지법 국정감사에서는 전주지법이 지난 2월부터 전주시의 협조로 시내버스와 승강장 안내판에 무상으로 상고법원 광고를 하는 것이 논란이 됐다. 여야 의원들은 "일방적이고 성급한 홍보"라면서 질타를 쏟아냈다. 사법부의 '상고법원 올인'은 이뿐이 아니다. 대법원의 '법원의 날 기념 공모전'에서 '포스터ㆍUCC 통합 부문 대상'과 '포스터 부문 금상'을 상고법원 주제의 작품들이 각각 수상한 점도 입길에 오르내리고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사법부의 '상고법원 홍보' 행태가 도를 넘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상고법원 도입은 우리 사법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드는 내용인 데다 찬반이 엇갈리는 상황이라 일방적인 밀어붙이기식 홍보보다는 차분한 정책 토론과 여론수렴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모든 국민이 대법원에서 재판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평등권 문제, 3심제에 어긋나는 위헌성 논란 등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데도 사법부가 공론화 노력보다는 의원입법이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강행만 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정우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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