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스스로 뉴타운 지구지정 직권해제라는 초강수 카드를 빼들 정도로 뉴타운 사업을 서둘러 접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부동산 경기 호황에 의존한 대규모 개발과 포퓰리즘에 기댄 사업 방식에 한계가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집값 상승에 기댄 ‘불도저식 개발’ 난항
뉴타운은 그간 산발적으로 진행돼 왔던 재개발·재건축 등 도시재생 사업을 한데 묶어 일괄 철거한 뒤 주택을 비롯해 도로와 공원, 학교 등 기반시설을 함께 짓는다는 구상에서 2002년 시작했다.
서울 뉴타운 1개 지구당 평균 5~10개의 재개발 구역이 포함됐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개발 단위가 대규모이기 때문에 개별 주민들이 부담하는 비용은 줄어들고, 개발이익은 커진다는 ‘규모의 경제 효과’를 바라보고 추진됐다.
문제는 이 사업이 부동산 시장의 활황이 지속된다는 불안한 전제를 바탕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한파가 부동산 시장에 몰아치면서 개발 비례율(개발 기대이익률)은 급감했다.
왕십리뉴타운 한 구역의 개발비례율은 지정 당시 110%에 달했지만 최근에는 70%대로 떨어졌을 정도다. 어렵게 사업을 끝낸 뉴타운 지구 내 아파트에선 미분양이 속출했다. 개발이익만을 바라보고 사업 참여의사를 밝혔던 주민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대규모로 사업이 진행됐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된다. 뉴타운 1개 지구 안에 재개발과 재건축 등 성격이 다른 사업이 한꺼번에 묶여 추진된 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셈이 됐다.
보통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은 재건축 지구로, 단독주택이나 소규모 밀집지역은 재개발 지구로 지정됐는데, 방식이 다르다 보니 한 곳에서도 동일 지구 내 세부 구역별로 사업 속도에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구에 필요한 기반시설의 설치 비용을 서로 부담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김현아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경제연구실장은 “한 재건축 단지의 사업 추진도 쉽지 않은데, 사업방식이 다른 여러 구역을 통합해 사업을 추진한다는 방식이 속도를 내기란 어려운 일”이라면서 “이런 개발 방식이 대규모 이주와 주택 멸실을 초래해 서민 주거난을 심화시키기도 했다”고 말했다.
◆‘표(票)’만 보고 추진된 사업
종합적인 큰 그림 없이 ‘포퓰리즘’과 맞물려 사업이 추진된 것도 뉴타운이 몰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다.
2002년 10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취임 3개월만에 선거 공약이었던 뉴타운 사업을 발표했다. 이듬해 시범지구가 지정된 지역의 땅값과 집값이 20%를 넘나들며 천정부지로 오르자 각 지역 주민들의 지정 요청이 쇄도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2006년 제4회 지방선거에서 지역구 후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뉴타운 공약을 내걸었다.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서울에서만 26곳의 뉴타운 정책이 쏟아져 나왔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뉴타운 50곳 추가 지정 공약을 앞세워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그 결과 시범지정 지구 불과 1년 후인 2003년 10월 종로구 교남지구, 용산구 한남지구 등 2차 뉴타운 지구 12곳이 추가로 발표되고, 이어 2005년 은평구 수색증산지구, 관악구 신림지구 등 11곳이 3차 뉴타운 지구로 지정됐다. 서울 지역 자치구 수를 넘는 지구(총 35개 지구, 균형발전촉진지구 포함)이 3년 만에 지정된 것. 당시 타당성 검토가 제대로 이뤄지거나 개발 파급효과가 고려되기 어려웠다는 지적이 나왔던 이유다.
하지만 이후 경기 침체의 직격탄을 맞아 뉴타운 사업이 지지부진하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은 공약을 내세운지 불과 2년만에 추가 지정은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현아 건산연 실장은 “‘지역 균형’이나 ‘형평성’이라는 명목 아래 마스터플랜이나 충분한 검토 없이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지구와 구역이 지정되니, 사업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나날이 커졌던 것”이라면서 “도시 재정비사업은 ‘정치’와 일정 부분 독립성을 갖춰야 함을 보여주는 선례를 남긴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