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얼굴 잡느라 옆의 김대중 잠깐 비치자 방송국 발칵 뒤집혀

2015. 8. 2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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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1회 유신 쿠데타
[한겨레]
1971년 3선 연임에 성공한 박정희는,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 통과를 주도한 ‘10·2항명파동’의 공화당 4인방 등 여권내 반대세력도 가차없이 탄압했다. 사진은 그해 10월23일 김대중 의원이 국회 본회의에서 김종필 총리, 신직수 법무장관이 출석한 대정부질문을 통해 중앙정보부의 전횡을 규탄하는 모습.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의 일생을 그리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은 <한겨레>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 19번째 이야기다.

이 이사장이 걸어온 길은 20세기 초 일제강점기부터 21세기 지금에 이르기까지 90여년에 걸쳐 있다. 이 일대기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해방 전후 대학 시절과 미국 유학, 사회운동 시절을 거쳐 정치인 김대중과 만난 뒤 현대사의 파란과 굴곡을 헤쳐 나오는 시기를 모두 아우를 예정이다. 그의 삶은 일찍이 사회문제에 눈뜬 여성운동가의 삶이었고,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간난신고를 헤쳐 나온 종교인의 삶이었으며, 남편과 함께 불굴의 의지로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투사의 삶이었다. 이 일대기는 매주 한번씩 진행하는 육성 인터뷰를 바탕으로 삼아 김대중평화센터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보관된 개인 문서와 구술 사료, 저서, 관련 책과 지인들의 증언을 참고해 집필한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1971년 대선과 총선을 이끈 김대중은 7월20일 신민당 임시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 도전에 나섰다. 자동차 사고로 몸이 불편한 상태였다. “남편은 박정희 정권에 맞설 강력한 야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선거에서 큰 공을 세웠고 국민의 지지도 높아서 당수가 되는 것이 순리라고 보았지요.” 문제는 민심과 당심의 불일치였다. 신민당 주류 지도자 유진산은 ‘진산 파동’으로 당권 경쟁에 나설 수 없는 처지였다. 유진산은 총재대행 김홍일을 대리인으로 세웠다. ‘40대 기수’들이 여기에 가담했다. 전당대회는 김대중·김홍일·양일동 세 사람이 겨루는 자리가 됐다.

중앙정보부는 야당의 당권 경쟁에 자기 일처럼 개입했다. 김대중이 당권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앙정보부에 떨어진 임무였다. 김대중 지지자들을 상대로 한 협박과 매수가 판을 쳤고 선거운동 방해 행위가 잇따랐다. 전당대회는 서울 시민회관에서 이틀에 걸쳐 치러졌다. 시민회관 밖에서는 비가 내리는 중에도 수천명의 당원과 시민이 김대중을 당선시키라고 소리쳤다. 김대중은 3차 투표에서 김홍일에게 패배했다. 선거가 주류의 승리로 끝나자 절망과 흥분이 뒤엉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민심의 척도인 택시운전사들은 신민당 선거 결과에 욕을 퍼부었다.

1971년 대선에서 억지로 승리한 박정희는 ‘정적’ 김대중을 반대세력의 배후로 몰기 위해 그해 11월 대학원생인 김대중의 큰아들 김홍일을 중앙정보부로 끌고가 고문하는 등 전방위 탄압을 가했다. 사진은 71년 4월 대선 출마 무렵의 김대중·이희호 부부와 세 아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둘째 김홍업, 첫째 홍일, 셋째 홍걸.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선거 패배는 김대중의 몸과 마음을 타격했다. “남편은 상심이 컸어요. 대선 때부터 계속된 선거운동으로 피로가 쌓인데다 자동차 사고의 후유증이 겹쳐 두 달 동안이나 병상에 누워 지냈지요.” 병상에서 일어났지만 김대중의 활동은 자유롭지 못했다.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매장 공작은 당권 경쟁이 끝난 뒤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김대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요원들이 미행했다. 동교동 집은 24시간 감시당하고 전화를 도청당했다.

중앙정보부의 목표는 김대중을 국민의 뇌리에서 지우는 것이었다. 신문·텔레비전·라디오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사라졌다. 김대중과 관련된 보도는 작은 것까지 금지됐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에 관한 기사는 좋든 싫든 쓰지 말고 김대중이라는 이름도 쓰지 말라고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렸다. 이름만 봐도 국민들이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김옥두는 중앙정보부의 통제가 어느 정도였는지 회고록에서 밝혔다. “어느 날 김 의원이 아시아영화제에 초대받아 참석했다가 주최 쪽의 배려로 한국 배우 옆에 앉은 적이 있었다. 그때 텔레비전 카메라가 배우들 얼굴을 잡느라고 김 의원이 화면에 두 번인가 잠깐 비쳤는데, 중앙정보부는 그걸 트집 잡아 방송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김대중이 강연 장소를 잡는 것도 어려워졌다. 예약한 장소는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취소되기 일쑤였다. 중앙정보부는 흑색선전도 계속했다. “남편이 지방의 지지자들에게 인쇄물을 부치면 우체국에 나가 있는 전담 요원이 남편 인쇄물을 골라내 없애버렸어요. 내용물을 빼내고 유령단체 이름으로 남편을 비방하는 인쇄물을 넣어서 보내기도 했고요. 우리의 뜻을 알릴 통로가 막힌데다 비방·중상까지 당했지요.”

1971년 7월 당권 도전에 실패한 뒤
김대중은 두달 동안 병상에 누웠다
동교동 집은 24시간 감시·도청되고
언론에선 ‘김대중’ 석자가 사라졌다

성난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사법파동, 광주대단지사건 이어
공화당 내 항명파동이 불거지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는 중에 박정희 독재에 대한 국민의 반발이 들끓었다. 1971년 7월 ‘사법파동’이 일어났다. 법관들이 정권의 수족 노릇을 거부하자 중앙정보부는 사법부를 부패 집단을 모는 공작을 폈다. 7월28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 42명 가운데 37명이 사표로 항의했고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들도 재판권 침해 사례를 폭로하고 집단사퇴를 결의했다. 지방의 판사들도 가세했다. 전체 판사 415명 중 153명이 사표를 냈다. 사태는 8월말에 가까스로 수습됐으나 이듬해 정권은 법관 재임용에서 주동자 48명을 무더기로 탈락시켰다. 사법부는 정권의 충견이 되었다.

사법파동 직후인 8월에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 일어났다. 정부는 1969년부터 서울 청계천 일대의 판자촌 빈민들을 강제로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켰다. 그 수가 14만5000명에 이르렀다. 들판에 쓰레기처럼 버려진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1971년 8월10일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성난 군중은 파출소와 경찰차에 불을 지르고 관공서 건물을 파괴했다. 이어 8월23일에는 서울 노량진 큰길에서 특수부대원 24명이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다. ‘실미도 사건’이었다. 특수부대원들은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서 북파 특수훈련을 받던 공군 특수부대 소속이었다. 이 사건으로 특수부대원 16명이 죽고 경찰과 민간인 5명이 숨졌다. 생포된 사람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1972년 박정희는 이른바 ‘7·4 남북공동성명’을 깜짝 발표해 국민들이 통일의 기대감에 들떠 있는 사이 10월17일 유신헌법을 공포해 독재체제를 다진다. 사진은 ‘7·4 성명’ 밀사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왼쪽)이 그해 11월3일 제2차 남북조절위원장 회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있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0월에는 공화당 내부에서 일어난 반발을 폭력으로 잠재우는 ‘10·2 항명파동’ 사태가 났다. 당시 공화당 주류 핵심은 당의장 백남억, 정책위 의장 길재호, 중앙위 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진만이었다. 이 4인 체제는 애초 박정희가 당을 장악하려고 세운 것이었다. 4인방은 대선 승리 이후 독자 노선을 걸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박정희는 오치성을 내무부 장관으로 앉혀 4인방을 압박했다. 오치성에 대한 4인방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야당이 오치성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자 공화당 4인방은 10월2일 야당에 동조했다. 해임안은 찬성 107표, 반대 90표로 가결됐다.

박정희는 격노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네 사람을 남산으로 끌고 가 갈비뼈를 부러뜨리며 죽기 직전까지 고문했다. 길재호·김성곤은 탈당해 의원직을 잃었다. “이 사건이 났을 때 남편은 의원들이 남산 중앙정보부로 찾아가 만행을 규탄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무력한 야당은 내용 없는 성명 하나 발표하고 말았다. 김대중은 10월23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했다. “공산당 잡으라는 중앙정보부가 이 나라 정치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입법부가 중앙정보부에 유린당하고 있어요. 비록 내 목숨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규탄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항명파동’ 이후 공화당은 박정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신세로 떨어졌다. 의회정치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대학가에서는 학원을 병영화하는 교련교육에 대한 반대투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10월14일에는 학생 1만여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월15일 박정희는 서울 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서울의 대학 8곳에 무기휴업령을 내리고 대학 안에 군대와 전차를 들이밀었다. 학생 1889명이 연행됐다. 10월16일 무장 군인 대학 난입에 항의하는 지식인 64인 선언이 나왔다. 선언에 참여한 리영희·천관우가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11월에 들어서는 이희호의 동교동 집에까지 탄압의 마수가 뻗쳐 들어왔다. “큰아들 홍일이가 영문도 모른 채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어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했는데,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미칠 것 같았지요.” 김홍일은 그때 경희대 대학원 학생이었다. 김홍일의 증언이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내가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리더니 그대로 군홧발로 옆구리와 가슴을 사정없이 내질렀다. 당장 숨을 쉴 수 없어 곧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떠보니 여전히 그 방이었다. 처음엔 나에게 서울대 학생들을 어떻게 뒤에서 조종했느냐고 캐묻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본색을 드러내고 ‘1971년 대선 때 어떤 역할을 했느냐’고 물으며 고문을 하고 두들겨 팼다.”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한 중앙정보부는 일주일 만에 김홍일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홍일이는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왔어요.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 마음이 아팠지요. 죄 없는 사람을 그렇게 괴롭히다니….” 박정희 정권은 11월12일 전 서울대생 조영래·이신범·장기표·심재권을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속했다. 정권은 네 사람을 불법 연행한 뒤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 미리 짠 시나리오대로 사건을 만들어냈다. 이 사람들이 주동이 돼 내란을 일으키려고 했으며 김대중을 혁명위원장에 추대하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공소장 내용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때부터 중앙정보부는 국면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사건을 날조해 김대중을 배후조종자로 엮어 넣기 시작했다.

자동차 사고 후유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김대중은 11월19일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편은 처음엔 손만 다친 줄 알았는데 갈수록 증상이 커졌어요. 고관절 손상 때문에 허리와 무릎이 아파 걷기가 힘들어지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어요.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마음 놓고 치료를 받을 수 없었어요. 정권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거든요. 어쩔 수 없이 도쿄 게이오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요.”

중앙정보부 끌려간 큰아들 홍일은
고문 시달리다 1주일만에 풀려나
“그 모습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박정희는 비상사태 선포 와중에
남북공동성명이란 깜짝쇼를 했다
“영구집권 악용하려는 것 아닌가”
우려는 3개월 뒤 현실로 나타났다
허전한 마음에 다시 시작한 공부
하지만 이내 곧 다시 접어야 했다

김대중이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 중인 12월6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북한의 남침 위협을 이유로 들었다. “남편은 치료를 마치지 못하고 12월16일 서둘러 귀국했어요.” 김대중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의 남침 위협은 허구의 선전”이라고 정면으로 맞받았다. 독재에 목이 눌린 언론은 김대중의 발언을 보도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12월27일에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내놓았다. 이 법으로 박정희는 언제든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자신을 독재자라고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72년 여름 박정희 정권은 다시 한번 국민을 놀라게 했다. 7월4일 오전 10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텔레비전과 라디오로 생중계된 기자회견에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후락은 5월2일부터 닷새 동안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했다고 밝혔다. 또 북한의 부수상 박성철이 5월29일부터 6월1일까지 서울에 머무르며 박정희와 한 차례 회담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합의한 남북공동성명은 통일 3대 원칙으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내걸었다. 온 나라가 순식간에 통일 열기에 휩싸였다. 금방이라도 남북통일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희호는 박정희의 조변석개하는 태도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 발표를 듣고 깜짝 놀랐지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고요. 남편도 고심했어요.” 박정희는 집권 이래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탄압했고 열흘 전 6·25 22돌 기념식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평화공세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경 연설을 했다. 바로 그런 말을 하는 중에 북한과 남북공동성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1971년 5·25 총선 직전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 김대중은 후유증이 심해져 11월9일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게이오대학 부속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고관절 손상으로 이후 평생토록 지팡이에 의존해야 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대중은 7월13일 남북공동성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통령 선거 때 주장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정책이 반영된 것이었으므로 환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김대중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처럼 자신의 기본정책을 국민 앞에 당당하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남몰래 처리해놓고 국민에게 사후 승낙을 받는 기만적인 방식을 쓰고 있다”고 박정희를 비판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이 지금 이 민족의 성스럽고 중대한 과업을 자기의 영구집권에 악용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혹을 짙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중의 걱정은 3개월 뒤 사실이 돼 나타났다.

1972년은 이희호에게 결혼 10돌이 되는 해였다. 10년을 한집에서 모셨던 시어머니가 그해 5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희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내 나이가 그때 만 50살이었어요.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허전한 마음이 들었어요. 박사과정에 들어가자고 마음을 먹었지요. 미국 유학 갔을 때도 장학금 연장이 안 돼서 포기하고 돌아왔거든요. 가을학기에 연세대 야간 행정대학원에 등록했지요.” 이희호의 학업은 대학원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단됐다. 10월17일 박정희가 ‘10월 유신’이라고 부른 제2의 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그날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를 거의 다 써가고 있었어요. 다섯 시쯤에 권노갑 비서관이 집에 들어오더니 그러는 거예요. ‘저녁 7시에 중대 발표가 있답니다.’ 그 말을 듣고 ‘시국도 심상치 않은데 혹시 계엄령을 선포하는 건 아닐까요’ 했더니, ‘에이, 사모님도. 무슨 계엄령 날 일 있겠어요?’ 그래요.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되더라고요. 한 달 전쯤 차를 타고 광화문 앞을 지난 적이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필리핀에 계엄령이 내렸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순간 여기도 계엄령이 선포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기억이 있어서 예감이 아주 안 좋았어요.”

이희호는 예정대로 저녁 7시 수업을 들으려고 연세대로 갔다. “강의실에 앉아 이극찬 교수의 강의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집 운전기사가 문틈으로 손짓을 하더라고요. 무슨 일인가 하고 가보니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거예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요. 그러고 나서 수업이 시작됐는데 급사가 들어와 쪽지를 교수한테 전해주는 거예요. 계엄령이 내려 휴교에 들어가게 됐다며 즉시 하교하라는 거예요.” 이희호는 곧바로 학교를 나와 동교동으로 향했다. 돌아와 보니 헌병들이 벌써 집을 둘러싸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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