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역사를 빚다..해방둥이 빵집 '태극당'

2015. 8. 1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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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는 퇴근길에 독일빵집 스폰지 케이크를 들고 오시곤 했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던 스폰지 케이크는 손녀딸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생각하면 독일빵집 봉투를 흔들면서 함박 웃음으로 들어오시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서울로 전학오던 날, 남영동 파리제과에서 먹었던 아이스크림도 잊지 못한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컵에 담긴 진한 우유맛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었던지. 가끔 이런 빵집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젠 이런 빵이나 아이스크림 맛을 보기가 힘들다. 화장품 매장이나 커피숍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4층 건물의 '태극당'에 태극마크가 그려진 간판은 태극당의 70년 역사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광복 이래 70년 세월을 꿋꿋하게 처음 맛 그대로 지켜내는 빵집이 있다. 장충동에 있는 '태극당'이 바로 그 주인공. 뉴욕제과, 파리제과, 독일빵집 등 화려한 이름의 제과점들 사이에서 태극당이라는 상호는 다소 낯설다. 창업주 신창근 대표는 광복의 기쁨을 담아 이름을 태극당이라고 짓고 우리꽃 무궁화를 태극당의 얼굴로 삼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한 후, 빵집을 경영하던 일본인이 돌아가면서 두고 간 집기를 받아 1946년 태극당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배고프던 시절, 우리 민족이 배부르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빵을 넉넉히 만들면 그게 애국이라 생각하고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지금 3대째 이어져오고 있다.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태극당 내부.

장충동에 있는 태극당은 건물 외관부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진열장 안에는 오란다빵, 사라다빵, 덴마크빵 등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한 빵들이 가득 들어있다. 무슨 빵을 먹을까 고르는 것 부터가 흥미롭다. 유리 케이스 안에 있는 빵을 한참 들여다 보고 있으니 야채사라다와 단팥빵을 권한다. 직원이 꺼내주는 빵 포장지도 옛날에 쓰던 것 그대로다. 시간여행을 온 것 같아 즐겁다.

빵도 옛 모습대로, 진열도 옛 모습대로.

빵 사이에 야채를 듬뿍 넣은 야채사라다빵을 손에 쥐니 묵지근하다. 한 입 베어 무니 사각사각 야채 씹히는 맛이 좋다. 반 개를 먹고 나니 배가 부르다. 한 끼 식사로 너끈한 야채사라다빵은 지금까지도 인기있는 빵이다.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러 왔다는 20대 청년은 "태극당에서 빵을 사면 꼭 내가 들어야 한다."며 "다른 곳에 비해 크기가 크고 무게가 많이 나가는데 내 여자 친구는 힘이 약하다."며 농담을 했다.

직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곳에 비해 빵이 크다고 손님들이 말씀하신다. 그런데 빵만 큰 게 아니다. 우리 집은 반죽을 할 때도 우유나 계란으로만 한다. 좋은 재료로, 재료를 아끼지 않는 것이 우리 빵집의 자랑이다."라고 서슴치 않고 말했다. 배고픈 국민들에게 배부르고 맛있는 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창업주의 특별한 신념이 지금까지 전해지며 '아, 그래서 태극당이야'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태극당의 대표메뉴 야채사라다빵은 반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태극당이 특별한 건 빵만이 아니다. 자리에 앉아서 태극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물건들과 인테리어를 감상해 보자. 자리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니 화려한 샹들리에가 눈길을 끌었다. 태극당을 최고로 꾸미고 싶었던 창업주가 이태리에서 수입해온 최고급 샹들리에다.

창업 이래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는 어항은 그 당시 부의 상징이었다. 다른 한 쪽 벽은 우유와 계란을 공수하기 위해 세운 남양주 목장의 전경이 크게 걸려있다. 널찍한 테이블과 편안한 의자에 앉아 태극당을 채우고 있는 물건들과 인테리어를 보며 오래된 것들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태극당 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 대부분 어르신들이다.

한참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다섯 명의 여성이 눈에 띄었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우들이다. 태극당을 잘 아냐는 질문에 "태극당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며 오히려 필자에게 반문했다. "여기는 교통도 좋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곳이라서 약속 잡기 좋아요. 전 여기 오면 단팥빵이랑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주로 먹어요."라며 말을 이어갔다. 6~70년대 만남과 미팅 장소로 유명했던 이곳에서 단팥빵과 우유를 시켜놓고 미팅하던 때를 떠올리던 한 60대 여성은 "그 땐 이게 고급이었다우."라며 단팥이 듬뿍 든 빵을 베어 물었다.

옆 테이블에선 단정한 양복 차림의 김흥배(83) 씨가 친구와 모나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15년 전 동국대 교수직에서 퇴임했다는 그는 "학교 재임시절부터 태극당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오래됐는지 헤아릴 수 없다."며 "지금도 모나카 먹으러 가끔 온다."고 웃었다. 태극당 모나카는 고소한 모나카 피 안에 진한 우유맛 아이스크림을 가득 넣어 만든다. 남양주 목장에서 우유와 계란을 직접 공수해 만든 모나카 아이스크림은 요즘 아이스크림과는 달리 달지 않아 좋다. 태극당을 대표하는 모나카 아이스크림은 지금도 최고의 아이스크림으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광복 70년, 우리는 부침이 심한 세월을 건너왔다. 태극당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잊혀지는 서울에서 70년을 한결같이 한 자리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태극당이 고집스럽게 옛날 방식을 지키고, 빵 맛을 이어가는 건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빵집, 무궁화와 태극당의 이름으로 지켜가겠습니다.'라던 70년 전 그 청년의 약속 때문일 것이다. 나라를 위한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라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내는 거라는 울림을, 태극당은 우리에게 묵직하게 전해준다.

정책기자단

|최은주 ej01124@naver.com새로운 것을 찾고 기록하길 즐긴다. 문화,여행에 관심있는 정책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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